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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사랑 없이는 같이 못 먹는다는 양푼이 비빔밥을 넉넉하게 비볐다. 송송 썰어 살짝 무친 배추 겉절이도 넣고, 신선한 상추도 아낌 없이 팍팍 넣고, 두부가 듬뿍 들어간 구수한 멸치 된장찌개에 알맞게 매운 고추장까지 인심 좋게 넣어서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숟갈까지 넣으니 와! 기가 막히다. 남편이랑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아구아구 냠냠냠 볼이 터지도록 먹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1박 2일이 한창 방송되고 있었다.

마침 1박 2일 속 그녀들도 오물오물 맛있게 무언가를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는 순간 볼이 미어지도록 밀어 넣은 내 밥숟가락이 심히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남편은 열중해서 먹고, 집중해서 보느라 내 볼에 부끄러워 소름이 돋은 줄을, 부지런히 음식을 퍼 나르던 내 숟가락질이 점점 느려졌음을, 모르는 듯 했으나 나는 더 이상 아구아구 비빔밥을 퍼 먹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여배우라고 해도 서른 일곱 살의 최지우가, 서른 넷의 김하늘이 그리도 다소곳이 앉아 저리도 얌전히 음식을 먹는데, 아무리 아줌마라고 해도 서른 셋의 나는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들을 보면 아줌마 경력이 늘어갈 수록 점점 더 화통대담해지고 점점 더 내숭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보이던데, 어쩌면 여자들에게 내숭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말이다.

사실 나라고 처음부터 양푼에 밥을 비벼 하마 처럼 입을 쩍쩍 벌리며 먹었겠는가? 나도 한 때(??)는 음식점의 음식들을 남길 줄도 알았으며, 입가에 양념이 묻을까 조심조심 신경 써 가며 밥을 먹기도 했었다. 뜨거운 국을 그릇째 후후 불어 마시지도 않았었고, 스파게티나 라면 같은 면 요리는 포크로 돌돌 말아 입을 '아~'가 아닌 '오~' 정도로 벌려 오물오물 먹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말이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갔을 때 남편에게 무언가 말 실수를 하여 급히 남편을 달래줘야 했을 때가 있었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남편에게 팔짱을 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콧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남편은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며 앞으로도 이렇게 팔짱을 끼고 다니자며 한동안 싱글벙글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생긴 후 아이를 안고, 업고, 쓰다듬어 주느라 남편에게는 제대로 된 애정표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끊임 없이 노력하며 지켜 가는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받지 않도록 신경써서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 더 표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워 보이도록 노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리라 다시금 결심하는 것, 이미 결혼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전혀 다른 사람이 돼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남편과 연애를 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올백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출신을 알 수 없는 축축 늘어진 옷들을 입고 아구아구 밥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워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도 절대로 머리를 바짝 묶지는 않았던(큰 얼굴이 드러날까봐), 연애시절 남편을 만날 때는 가장 예쁜 옷들로만 입고 있었던, 자장면도 아름답게 먹었던 과거의 내 모습을 꼭 다시 되찾겠노라고 결심에 결심을 했다.

남편을 위해, 나를 위해, 우리의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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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장장 세 시간, 꽃샘추위에 날은 춥고 아이들은 슬슬 졸음이 오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대로 길 위에 서서 세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고, 일행 중 우리 집이 가장 가까웠고... 모두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마친 후 점심을 먹고 노닥거리며 오후에 있을 특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 식당에서 수다를 좀 떨다 보면 특강 시간까지 무난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문제는 추위와 아이들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예원이네와 밀린 이야기를 좀 하고 운동장에서 잠시 놀다 보면 얼추 시간이 맞을 줄 알았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보다 날씨는 더 추웠고 시간은 더 천천히 갔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잠시나마 눕혀 재울 곳, 우리 어른들도 조금 더 편히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고 가장 쉬운 방법은 교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쉬는 것이었지만, 결단을 내리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집은 쓰레기통이 '형님' 할 만큼 너무너무 심하게 말 할 수 없이 지저분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있는 집이 다 그렇죠' 하며 서글서글하게 웃는 예원 엄마가 차마 예측하지 못할 더러움이 우리집 그 자체였다. 예원 엄마는 특히나 부지런한 살림꾼이니 때문에 예원이네는 언제나 먼지 하나 없는 말끔함을 자랑한다. 가끔은 자신의 그런 기질이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며 토로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발 디딜 곳 없는 꼴을 만드는 나 보다야 백만 배는 나은 습관이다.

함께 우리집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더럽다, 정말 더럽다, 상상을 초월하게 더러울 것이다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이해해 줄 것을 하소연 했고, 현관문이 열리자 마자 후다닥 들어가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만 대충 치웠다.




화끈...... .
얼굴이 달아 오르고, 나는 그 날의 후유증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얼굴을 감싸게 되었다.

소파 밑에 들어가 있는 벗어 놓은 양말, 여기 저기 굴러 다니는 아이이의 블록들, 싱크대 위에 겹겹이 마치 유물처럼 쌓여 있는 그릇과 접시들, 그리고 차마 눈 뜨고 못 볼, 말라 붙어 있는 바닥의 김치 국물이며 과자 부스러기.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진지했는데, 나 홀로 좀비처럼 엇박자를 탔다. 치부를 들켜 버린 까닭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저찌 그 날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갑작스럽게 손님을 초대하게 된다면 적어도 세 시간 전에는 나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현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절대로 열어 주지 않을 거라는 엄포도 놓았다.

손님이 오시기 세 시간 전,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할 것인데 밀려 있는 설거지와 빨래도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못 해도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얼른 샤워를 하고 한 듯 안 한듯 투명 메이크업을 하는 데 삼십 분, 남편의 손님을 떡진 머리와 눈곱 낀 얼굴로 맞이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내 놓을 간단한 음식 준비에 또 삼십 분. 실제로 써 보면 세 시간이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손님과 함께 갑자기 집으로 오면서 주차장에서 전화하는 남편은 빵점, 그나마의 귀띔도 없이 초인종부터 누르는 남편은 마이너스 이백점. 집안 꼴을 저렇게 지저분하게 해 놓는 나는 낙제다. 앞으로는 아이가 자는 시간에 꼭 깨끗하게 청소를 해 두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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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나를 폭발하는 남편의 대화법'이라는 글을 썼다가 '웃기네, 너나 잘 하세요'류의 덧글 폭탄을 맞았다. 행여나 나를 옹호해 주는 (큰절을 올리고 싶도록 고마운) 분들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소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 했던 고마운 분들의 덧글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삼일 동안 컴퓨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을 덮어 쓰고 반성에 또 반성을 했다.

무엇을???
나는 왜 이렇게도 글을 쓰지 못하는 가! 하는 것을...... .
가볍게 한 번 웃자는 의미로 쓴 글에,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시죠?'라는, '4주 후에 뵙겠습니다'가 언뜻 떠오르는 덧글까지 달린 것을 보면 올바른 대화를 못 하는 것은 남편 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네네, 당연히 저는 남편을 98% 사랑하고요, 다만 2% 부족한 남편의 대화 '기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제목에도 썼었잖아요,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대화법'이라고요.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글 아래에도 어쩌면 나를 울상짓게 만드는 덧글들이 가득 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곳은 내 블로그고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권한이 있으니까......
그런데 뭐지? 은근히 소심해지는 이 상황과 어쩐지 비겁해 보이는 이 변명들은?(참고로 내 혈액형은 A형이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자들은 역시 화성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홀로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여심을 감동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남편들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아내의 마음에 기름을 부어 결국 폭발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꾸만 '원인''해결책'을 제시해 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상황 1> 원인을 찾는 대신 공감과 이해를

자고 일어났는데 한겨울에 모기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한 두방 물린 것이 아니라 허리에 네 개, 다리에 세 개 물린 자국이 있어서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래도 간지러워서 벅벅 긁다가 나는 남편에게 모기에 물린 자국, 내가 벅벅 긁어서 더욱 벌겋게 부어 오른 자국을 보여 주며 '나 모기 물렸어"라고 말했는데, 남편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당신 어제 입었던 옷이 뭐지?' ----'몰라' 
'요가 갔을 때 입었던 요가복 그 옷 속에 모기가 살고 있나? ---- '어??'
'이불 언제 빨았어?'----'뭣이라???'

결국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모기에 물러 잔뜩 부어 오른 모습을 보여 준 까닭은 당장에 모기를 잡아서 죽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간지러움에 시달리니까 나를 좀 위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식구 중 나 혼자서 모기에 물렸으니까 그 윈인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했고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럴 땐, '많이 간지러웠겠다'. 딱 한마디면 되었을 것을...... .


<상황 2> 말 대신 행동으로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하면서 청소, 빨래, 음식 장만까지 혼자서 다 해야했던 내가 남편의 퇴근 하자마자 쪼르르 달려가서 어깨를 있는 대로 늘어 뜨리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집으로 좀 오셔서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그럼 당신이 회사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맞불을 놓아 나를 기막히게 만든다.

나도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전업 주부이므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잘 해나가는 것도 프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도 가끔은 불평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 유독 그 날따라 혼자서 전전긍긍 힘들었기 때문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게다.

이럴 땐 '힘들었지? 내가 많이 도와줄게'라든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아내는 맘이 녹아내렸다. 걸래질을 진짜 시킬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맘에 없는 말을 하기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면 차라리 없이 꼭 껴안아 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면 아내는 금세 생기를 찾게 될 것이니 말이다.



<상황 3> 맞장구, 혹은 말꼬리 따라하기

남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걸그룹을 보느라 헤벌쭉해진 남편을 보며 나는 인터넷에서 본 과거 사진과 함께 과거에 그 소녀가 사실은 좀 놀았던 언니 중 하나였다더라, 요즘에는 꼭 성형 수술이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주사로 시술만 받으면 이미지가 확 달라져서 예뻐진다더라, 나도 의학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누구 못지 않게 예뻐질 수 있을텐데...... 등등 내가 생각해도 쓸 데 없는 소리를 늘어 놓을 때

남편은 어디서 그런 소리를, 네가 봤냐며 정색하고 따져서 아내를 무안하게 만들기 보다는 아내가 하는 말에 '그래, 그래, 그렇다며?, 응, 그렇지, 얼씨구, 오호라!' 맞장구를 쳐서 아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여자란 때로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일도 좋아하고 자기가 연예인이랑 비교하는 자체가 이미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래도 한 번 무리수를 던져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맞장구를 치거나, 아내가 하는 말의 마지막 부분을 따라하며 반복하면(누구누구가 어릴 때 그렇게 놀았다던데? 하면 아,,,좀 놀았었구나. 나도 조금만 손 보면 엄청 예뻐질 수 있을텐데, 하면 그럼 엄청 예뻐질 수 있지. 하며 말꼬리를 따라하는 대화기술) 남편이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나를 엄청 대우해 준다며 감동받을 것이다.

아참!
내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나는 그저 이따금씩 여자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해서 내 속을 긁는 남편의 대화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짝, 찰떡궁합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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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낙네(?)들과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날이 더우니 애들처럼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져서 우리는 이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수다를 좀 떨기로 했다. 몇몇은 편의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고 나머지는 근처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제각기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초콜렛과 견과류가 범벅이된 것으로 주문을 해 놓았다. 자외선은 피부의 적이자 노화의 지름길! 햇볕이 한풀 꺾일 때를 기다렸다가 오후 느즈막히 산책을 나갔기에 동네를 걷기에도, 앉아서 놀기에도 적당한 날씨였다.




살랑 바람이 한 점 불어왔던가, 후루룩 새가 한 마리 날아갔던가, 나는 잠시 정신을 놓은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솔 엄마! 다솔 엄마! 아이고, 다솔 엄마' 연거푸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던 이들이 벌써 돌아와서 입맛에 맞게 아이스크림을 척척 다 배분하고 내 것만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불러도 대답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아서 몇 번이고 나를 불렀다고 했다. 나는 겸연쩍은 듯 못 들었다며 배시시웃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듣긴 들었으되, 다솔 엄마가 나라는 것을 잠시 잊어 버리고 있었었다!!!!

넋을 놓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다솔 엄마'로 불린지도 벌써 10개월이 다 돼 가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잊어 버렸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임신 중에 우리 부부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새롭게 사귄 분들은 모두 우리를 '다솔 엄마'나 '다솔 아빠'로 부른다. 그러나 이름이 붙여진지 아직 1년도 안 돼서 그런지 문득문득 그 이름이 어색하게 들릴 때가 있기는 하다.

아이스크림도 다 먹고 동네도 한 바퀴 돌아 와 집에서 쉬는 중에, 휴대 전화를 확인 해 보니 낯선 전화번호의 인물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Loch Rannoch
Loch Rannoch by slimmer_jimmer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누구지?
문자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정은아--'로 시작한다.

여고 동창생이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가 바뀌었다며 새로운 전화번호를 안내 해 주는 내용이었다. 남편에게서는 '여보'로, 블로그에서는 '일레드 님'으로, 자주 왕래하는 친구들에게서는 '다솔 엄마'로 불려 왔기에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여고 동창에게서 그것도 글자로 내 이름이 불려지니 이것도 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새롭게 얻은 이름인 '다솔 엄마도' 아직은 귀에 설고
예전부터 써 오던 내 이름은 이제 불릴 일이 별로 없다.
어쩐지 내 이름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 조금 헛헛하고 조금 서글프다.

가끔씩 남편에게 내 이름을 불러 달라는 닭살스러운 부탁을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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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피곤했던 탓에 버스 안에서 잠시 기대에 쉬고 있었는데 건너편 옆자리에서 할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있는대로 툴툴거리셨는데, 그와는 별개로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방으로 가서 전화기 옆을 보라는 할머니의 심술궂은 대꾸를 들으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젊었을 때부터 몇 십년 동안 남편이 OO어디있어? OO는? 이라고 물어 봤을 것 아닌가?

남편의 출근 준비로 한창 바쁜 우리집의 아침, 남편이 갈 곳 잃은 새처럼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또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인데 잘 찾아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차마 못 물어 보고 계속해서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남편이다. 으이구--하는 소리가 목까지 차는 순간이었지만 모르는척 눈을 돌리다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수건 아래에 빨간색 휴대전화 끄트머리가 보인다.

이거?
남편의 눈 앞에 휴대전화를 대령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이어지는 남편의 보물찾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는 대개 아침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부처님 손바닥 처럼 나는 남편이 다음에 찾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알면서도 척척 대령해 주지 않는 것이 남편은 서운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스스로' 단번에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는 연습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잘 해 두는 편은 아니지만 양말, 속옷, 아기 기저귀, 손수건 등등은 늘 같은 서랍장 안에다 넣어 둔다. 이를 테면 양말은 작은 서랍장의 가운데 칸에, 아기 손수건은 아기 서랍장의 세 번째 칸에 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침마다 '여보, 양말 어디있지?'를 하염없이 외쳐댔다. 남편은 늘 느즈막히 출근 준비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2~3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기 때문에 늦도록 잠을 못자고 시달렸던 탓에, 나는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해도 눈을 반쯤 감고 비몽사몽 아침상만 겨우 차려 주었었는데, 그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 '여보, 양말 어디있지?'는 결국 나의 버럭질을 유발했다.

결혼한지 햇수로 3년 째. 그동안 버럭 버럭 몇 번을 했더니 남편은 무언가를 찾아야 될 때 나에게 어디 있는지를 묻는 대신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 보거나 냉장고와 냉동실을 번갈아 가며 몇 번씩 열어서 원하는 것을 찾곤 한다. 미안하게...... .

paper heart
paper heart by tuli nishimur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대신 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할 땐 조금 더 친절해 지는데,
여보, 아기 서랍장 맨 윗 칸 오른 쪽에 보면 가위 손톱깎이가 있어. 그거 좀 가져다 주세요.
여보, 냉장고 문 열면 문쪽에 양념통 가득 들어 있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케찹 좀 꺼내 올래요?
...... .

문득 뜨끔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고 업무 시간에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도,
집에 있다가 갑자기 컴퓨터가 말썽이라고 징징대며 전화를 했을 때도,
생수통에 물이 떨어졌다고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을 때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그 쉬운 버럭질도 없이) 차근차근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었다.

남자와 여자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들이 기록된 갖가지 심리서적들을 섭렵했음에도 이렇게 이해심이 부족하다니!(뜬금없는 반성의 시간이다.) 버스 안에서 나를 씽긋 웃게 만들었던 휴대전화 속 할아버지처럼 남편이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물어 올 지라도 나는 너그러히 대응해 주어야겠다. 물론 나도 어찌할 바 없는 버럭질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등장할 지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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