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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현지 가이드의 계략이었다.
수수한 옷차림과 소탈한 웃음을 가진 그를 그리 쉽게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여행지에서의 들뜬 마음이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금테 안경 너머에 있는 작지만 날카로웠던 그의 눈을 미쳐 알아 채지 못했다.

'역시 호주가 약을 잘 만들긴 해. 이 약 먹었더니 관절염이 금세 좋아졌어'라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주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가짜약을 파니까 조심하라'는 뉴스 앵커의 말이 들려 왔다. 엄마와 내 눈이 당혹감으로 마주치는 순간, 믿기 싫었지만 화면에 보이는 그 약이 엄마 손에 들려져 있던 그 약과 일치한다는 것을 엄마도 나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

뉴스에서 가짜라고, 패키지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속임수니 조심하라고, 크게 한 번 보도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호주 여행에서 가짜 약을 사 오는 사람들이 있다. 호주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약국에서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고, 여행객들을 홀리기 위해 '특별히' 제조가 됐다는 그 약은, 가격의 약 10~20배 정도를 부풀려서 팔고 있다고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바보가 약값으로 60만원에서 2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지불할까 싶겠지만, 그 바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일레드=바보



나는 결혼 전 부모님과 함께 간 호주 패키지 여행에서 녹색 홍합이 들어 있어서 관절염에 좋다는 약을 60만원 주고 사 왔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게 큰 돈인 60만원을 그 당시엔 어떻게 선뜻 지불할 수 있었는지, 참 생각할 수록 속상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약을 팔기 위해 계획되었던 그 패키지 여행'을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나의 바보같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은 그의 계략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호주 현지 가이드였던 그는 우리에게 호주의 역사와 문화, 법률 등을 설명해 주며 여행기간 내내 우리의 손과 발이 돼 주었었는데, 소탈한 듯 소심한 듯 자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늘 낮은 자세로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듣는 사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끊임없이 호주에 대한 정보를 전해 주는)을 했던 그는 식사 시간 마다 우리에게 호주에서만 특별히 난다는 몸에 좋은 식재료 들을 많이씩 먹기를 권유했다. 호주 패키지 여행의 특성상 건강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뜰, 어느 정도 경제력은 있으나 그만큼 나이도 많이 든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된 여행객 중 나는 유일하게 20대였다.

당시 엄마는 관절염 때문에 신경이 거슬리던 중이셨으므로 특히나 관절에 좋다는 청홍합을 끼니때마다 한 대접으로 드시곤 했다.

호주에서 유명한 아쿠아리움에 갔을 때 그는 호주에서 건져 올려진 상어에서 추출된 스쿠알렌이나 고래 기름, 그리고 병원비와 약값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호주의 복지 제도에 대해 참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지루해질 때면 가이드는 비밀처럼 자신의 생활들을 조금씩 이야기 해 주었는데, 자기의 직업은 두 개라고 했다. 하나는 호주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요, 또 하나는(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아내가 운영하는 약국의 셔터맨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나면 속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만, 이경규의 무진장 허술한 몰래 카메라에도 진짜로 속는 연예인은 있었다. 하나의 잘 짜인 각본 아래에서, 5일 동안의 호주 여행에서 하나씩 하나씩 던져지는 미끼를 알아차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Barking Owl
Barking Owl by Erik K Veland 저작자 표시비영리


호주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가이드의 조카라는 남자 하나가 버스에 올랐다. 마침 쉬는 날이라서 삼촌을 보러 왔다고 했는데, 조카라는 사람이 삼촌이라는 가이드와 무언가를 상의 하더니 우리를 약공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원래는 절대로 안 되는데,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세금 없이 도매가로 청정한 호주에서 생산된 질 좋은 건강 보조제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조카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박수까지 치게 만들더니 어느 외딴 곳에 있는, 겹겹이 철문으로 닫혀 있는 어느 약공장(공장인지 창고인지 잘 모르겠다.)에 다 우리를 내려 놓았다.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그 다음부터는 일이 술술 잘도 풀렸을 것이다. 호주 여행 내내 질리도록 들었던 호주 정부의 의료 정책과 호주의 우수한 약들을 부러워만 하던 여행객들에게 그것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건강에 관심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너도나도 값비싼 약을 사기 시작했고 우리 부모님도 슬쩍 그 대열에 끼어 드셨다.

'현금이 없는데......' 그럼 카드도 된단다. 비밀리에, 아주 힘들게 한정 수량만을 몇 개 빼서 주는 상황에서 카드 결재가 왠말이냐마는, 그 상황에서 청홍합이 든 관절염 약을 꼭 사야만 한다는 엄마를 말릴 수는 없었다. 관절염이 낫기만 한다면야 그깟(?) 60만원이 대수냐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절염 약이 가장 저렴했다는 것, 일행 중에는 백 만원이 훌쩍 넘는 약을 수북하게 사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이 아까워서인지 사실은 6만원 짜리 가짜약을 드시고도 엄마의 관절염은 기적처럼 나았고, 우리는 패키지 여행에서 절대로 가이드를 믿지 말자는 교훈을 얻었다.

그런데 아직도 해외에서 가짜약을 구입해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고 있어서 참 걱정스럽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가이드는 가이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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