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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대 역을 막 지났을 무렵일 것이다. 내가 갑자기 정색하며 친구를 다그친 것은...... . 정말 괜찮으니 솔직히 말해 달라고 물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친구의 눈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커졌지만, 나는 미쳐 친구를 배려할 겨를이 없었다. 네 옷차림이 우스꽝스럽지 않냐니 갑자기 무슨 말이냐며 되묻는 친구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내 긴 머리는 어떠냐며 동문서답을 했다. 너무도 놀랐기 때문이며 결코 예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 전철 문이 열릴 때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유유히 사라졌던 그 여자 말이다.

3월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 때문에 오늘 아침에 한참을 고민했다. 빨아서 넣어 둔 내복을 다시 꺼내야 하는가, 아님 레깅스로 만족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레깅스를 통이 큰 건빵바지 안에 입고 겹겹이 상의도 두툼히 입은 다음에야 안심을 하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3월말까지만 봐 주기로 한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원래의 내가 되기로 다짐 하며, 아직 남아 있는 추윗 속에선 멋내기를 잠시 미뤄두기로 타협을 했다. 그런데 집에서 멀어질 수록 일찌감치 봄 옷을 꺼내 입은 여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친구와 함께 탄 전철 안에도 온 몸으로 봄을 맞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독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청자켓에 짧은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가방을 옆으로 맨 모양이 딱 봐도 대학 새내기다. 그래, 한창 땐 추운 줄도 모르고 그저 예쁘게만 입기 마련이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의 그녀를 보고 있으니 살겠다고 투실투실하게 껴 입은 내 옷차림이 좀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래도 자기를 가꾸기 위해 멋을 낸 차림을 보니 예쁘긴 예뻐서 자꾸 쳐다보게 됐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불쑥 내 쪽을 쳐다 본다. 헉! 소리가 밖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놀랐다.

도도하게 날 바라보는 그녀는 못 돼도 사십대 중반은 돼 보였기 때문이다. 뒷모습은 영락없는 대학 새내기였는데 앞모습을 확인하니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니 정말 반전이었다. 아찔한 킬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녀가 전철에서 내리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모습이 결코 예뻐 보이지 않았다. 아줌마라고 해서 청자켓을 입지 말라는 법도 없고 머리를 기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울리지가 않는다. 나는 그제서야 내 모습을 떠올려 봤다.


나는 어렷을 때 서른이 되면 머리를 싹둑 자르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나이 들어서 긴생머리를 유지하는 것 만큼이나 볼품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 땐 나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결코 오지 않을 줄 알았지만 어느새 내 나이는 서른 한 살. 그러나 머리를 자르지는 못했고, 웨이브 파마를 한 지 시간이 오래 돼 파마가 풀리니 생머리에 가까운 머리 모양이 됐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한 것이다. 옷차림은 또 어떤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정색하고 친구를 다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친구는 한바탕 웃는다. 별, 일, 아, 니, 라, 는, 듯. 우리처럼 어중간(?)한 나이에 자칫 머리를 잘못 잘랐다간 아줌마 되는 건 한순간이라며 절대 머리를 자르면 안 된다는 친구다. 그래도 파마가 많이 풀린 건 사실이니 말 나온 김에 미용실에 가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이효리도 서른 하나고, 장나라도 서른 하나인데 우리가 미니스커트르 못 입을 이유도 없단다. 정말 그럴까? 내 뒷모습을 보고 대학생 쯤으로 생각했다가 앞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는 어린 친구들이 있을까봐 나는 너무 두렵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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