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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삼십 분 전만 해도 나는 그건 엄연한 '양다리'라며 친구 C양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추석,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올해는 가야지, 결혼은?, 아직도?, 네 나이가 몇이더라, 뒷집 누구는 애가 돌이라던데......' 등등 레퍼토리를 돌려가며 결혼과 관련된 끊임없는 곡괭이질 질문을 해대는 통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는 친구의 말에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나와 동갑내기인 친구의 나이는 올 해 서른 둘,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은 지난 설에 뵙고 이번에 다시 만난 친척 어르신이 아니라 내 친구일 텐데 걱정을 가장한 호기심으로 자꾸만 친구에게 결혼 이야기를 묻는 통에 C양은 혼쭐이 났단다.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것이 그녀의 작은 소망이다. 되도록 일찍 독신의 지옥에서 벗어나고는 싶지만 결코 아무나하고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도 다짐을 하는 내 친구 C는 두 달 전만 해도 '모태솔로'였다. 

고등학교 교사인 탓(?)에 0교시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되는 억울한 시간표를 지켜 내느라 내 친구는 도무지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었다. 게다가 학교와 집의 거리마저 멀어서 스스로 차를 운전해서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까닭에 평일에는 남자의 'ㄴ'도 만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친구의 곁에 이번에는 두 명의 남자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일이 잘 되려고 그러는 건지 잘 안 되려고 그러는 건지, 어찌저찌해서 일주일 상간으로 잡혀 있던 두 건의 소개팅에서 C양은 괜찮은 남자 둘을 만났고 이들 모두와 약 한 달에 걸친 데이트를 해 오고 있단다. 말이 한 달이지 평일에는 절대 시간을 낼 수가 없다니 토요일에는 A, 일요일에는 B와 데이트를 했다치면 많아 봐야 4번 남짓 만났을 것이다.

친구 왈, 가타부타 사귀자는 말이 없었으니 절대 양다리는 아니고, 지금의 상황에서 한 쪽을 재빨리 정리하는 것 보다 신중하게 몇 번 더 만난 상황에서 더 확신이 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남자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단다.

남자들 중 한 명은 연하, 한 명은 연상이라서 그런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확연한 차이가 있어서 내 친구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이들의 스타일은 대충 이렇다.

내 친구는 서른 둘, A씨는 서른 다섯. 겨우 세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너무 늦게 남자친구를 만들려고 하니 벌써 삼십 대 중반의 풍채 좋은 아저씨가 상대라고 떡하니 나타났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차태현도 서른 다섯이지만 일반인 서른 다섯이 어디 그런가? 그러나 외모는 좀 그래(?)도 매사에 친구를 배려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아주 넉넉하단다.

서른 둘의 내 친구를 막내 동생 대하듯 챙겨주고 먹을 것 하나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 줘서 만날 때마다 대우받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집에까지 늘 데려다 주는 것은 기본!

Erin and Jeff

Erin and Jeff by avpjack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한편 연하남 B군은 서른 살로 이제 막 직장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느라 오래까지 학생 신분을 유지해서 그런지 유난히 해맑다는 B군(서른의 남자를 나도 어느새 -군으로 칭하고 있다.)은 데이트를 할 때 발랄 그 자체란다.(서른 살 남자 연예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인성, 강동원이 있다.)

지난 번 만났을 때는 놀이 공원에 가서 초등학교 다닐 때 사 먹어 보고 조카들 간식으로나 사 주던 솜사탕을 사 먹었단다. 우리가 어렸을 땐 서른 살 아저씨들이 그저 늙수그레하게만 생각되더니,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연하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무엇을 해도 귀엽고 산뜻해 보인단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꾸만 '연인'보다는 '누나'의 심정으로 그 녀석(??)을 보게 되고 챙김을 받는 것 보다 챙겨 주는 것이 속편한 것이 흠이란다.

문득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 다섯의 남자도 서른 일곱의 여자 앞에서는 어리광도 부리고 상큼이로 돌변하지 않을까? 서른의 남자도 스물 대여섯의 여자 앞에서는 의젓하게 무게도 잡고 오빠만 믿으라고 엄포를 놓지 않을까? 생전 처음으로 연애라는 달콤한 마법에 빠져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얼른 둘 중 한 명을 선택했으면 좋겠는데, B군 보다는 A씨에게 한 표를 던진다. 내가 마흔이 되도 여든이 되도 항상 나를 어리게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는 훨씬 더 좋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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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정지영의 거부할 수 없는 달콤 목소리에 취에 잠도 떨쳐버린 채 라디오를 듣다가 재미있는 사연 하나를 듣게 됐다. 어떤 여자분이 문자메시지로 보낸 글이었는데 낮에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낯선 남자분에게 도움을 얻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연락처를 물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그 청취자는 어떤 방법으로 그 남자에게 연락을 해야 자연스러울지 너무도 고민이 된다며 조언을 구해왔다.

우연히 서점에서 만나게 된 낯선 남자에게서 뜻밖에 호감을 얻게 되고(자세한 내용이 소개됐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이 죽일 놈의 기억력...... .) 어색하게 주춤거리면서 연락처를 물었고, 이제 남은 순서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것인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단다.

사연을 보낸 여성분은 도움을 받은 남자분이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웠노라고 그래서 눈 딱 감고 연락처를 물었는데 남자분이 의외로 순순히(?)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며 수줍게 고백을 했다.

Radio Daze
Radio Daze by Ian Hayhurst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이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경험했던 황당했던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모든 수험생들이 꿈 속에서까지 모의고사를 풀고 낮에 잠깐 조는 잠에서조차 시험에서 낙방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중등 교원임용고사를 두 달 남짓 남겨 둔 어느 겨울이었다. 하늘이 늘 꾸물꾸물하고 9월말부터 겨울이 시작된다는 노량진에서 한창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아예 짐을 싸 들고 학원 근처 창문도 없는 1.5평(!!!!)짜리 고시원 방에서 먹고 자며 공부 기술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학원에서 수업을 듣을 때빼곤 답답한 고시원 방에 콕 틀어박혀서 책만 보는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 내가 본 것이 책이었는지 글자였는지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종이 쪼가리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암튼 늘 방에서만 공부를 하다가 너무 졸려서 어느 날엔 고시원에 딸려 있는 작은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독서실 안에는 예비 교사, 예비 경찰, 예비 행정 공무원, 예비 공인중계사의 책들이 가득했는데 정작 사람은 예비 대학생 한 명과 예비 국어 교사인 나, 딱 둘 밖엔 없었다.

Belinha has more than good looks
Belinha has more than good looks by betta design 저작자 표시비영리


졸려서 독서실에 갔는데 너무 세게 틀어져 있던 온풍기 때문에 더욱 졸음이 쏟아져서 나는 예비 대학생-재수생으로 보이는-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온풍기를 끄기로 맘을 먹었다. 온풍기가 천장에 달려 있었고 나는 키가 작으니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온풍기를 꺼야만 했다.

윙--- 기계음이 나던 독서실이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꺅 소리와 함께 뒤이어 나온 쿵 소리!

난방기를 끔과 동시에 내가 올라 서 있던 바퀴달린 의자가 움직이면서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쳐 진 것이었다. 그 방엔 나보다 한참 어린 재수생밖엔 없었지만 그래도 남자였던지라, 나는 부끄러움이 밀려와 바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한참을 고꾸라져 있으니 걱정이 됐는지 그 예비 대학생이 나를 일으키러 왔다. 더욱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모든 일들이 잘 수습됐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채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책상 오른 쪽으로 슬쩍 초코 우유 하나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올려다보니 아까 그 예비 대학생이었다. 우유와 함께 그는 나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내가 소개했던 라디오의 사연에서는 서점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준 어떤 멋진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여성이 그 사람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런데 내 경험에서는 시험 공부에 지쳐 부스스한 어떤 여자(그것도 한참 연상)가 난방기를 끄다가 꺅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것을 도와주었을 뿐인데 어떤 이유로 남자는 연락처를 물어 온 것일까? 그것도 초코 우유와 함께 말이다.

왠지 민망하라 것 같아서 그 날 이후로 다시 방에서만 공부를 했는데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던 그 남자의 심리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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