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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정지영의 거부할 수 없는 달콤 목소리에 취에 잠도 떨쳐버린 채 라디오를 듣다가 재미있는 사연 하나를 듣게 됐다. 어떤 여자분이 문자메시지로 보낸 글이었는데 낮에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낯선 남자분에게 도움을 얻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연락처를 물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그 청취자는 어떤 방법으로 그 남자에게 연락을 해야 자연스러울지 너무도 고민이 된다며 조언을 구해왔다.

우연히 서점에서 만나게 된 낯선 남자에게서 뜻밖에 호감을 얻게 되고(자세한 내용이 소개됐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이 죽일 놈의 기억력...... .) 어색하게 주춤거리면서 연락처를 물었고, 이제 남은 순서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것인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단다.

사연을 보낸 여성분은 도움을 받은 남자분이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웠노라고 그래서 눈 딱 감고 연락처를 물었는데 남자분이 의외로 순순히(?)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며 수줍게 고백을 했다.

Radio Daze
Radio Daze by Ian Hayhurst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이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경험했던 황당했던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모든 수험생들이 꿈 속에서까지 모의고사를 풀고 낮에 잠깐 조는 잠에서조차 시험에서 낙방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중등 교원임용고사를 두 달 남짓 남겨 둔 어느 겨울이었다. 하늘이 늘 꾸물꾸물하고 9월말부터 겨울이 시작된다는 노량진에서 한창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아예 짐을 싸 들고 학원 근처 창문도 없는 1.5평(!!!!)짜리 고시원 방에서 먹고 자며 공부 기술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학원에서 수업을 듣을 때빼곤 답답한 고시원 방에 콕 틀어박혀서 책만 보는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 내가 본 것이 책이었는지 글자였는지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종이 쪼가리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암튼 늘 방에서만 공부를 하다가 너무 졸려서 어느 날엔 고시원에 딸려 있는 작은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독서실 안에는 예비 교사, 예비 경찰, 예비 행정 공무원, 예비 공인중계사의 책들이 가득했는데 정작 사람은 예비 대학생 한 명과 예비 국어 교사인 나, 딱 둘 밖엔 없었다.

Belinha has more than good looks
Belinha has more than good looks by betta design 저작자 표시비영리


졸려서 독서실에 갔는데 너무 세게 틀어져 있던 온풍기 때문에 더욱 졸음이 쏟아져서 나는 예비 대학생-재수생으로 보이는-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온풍기를 끄기로 맘을 먹었다. 온풍기가 천장에 달려 있었고 나는 키가 작으니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온풍기를 꺼야만 했다.

윙--- 기계음이 나던 독서실이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꺅 소리와 함께 뒤이어 나온 쿵 소리!

난방기를 끔과 동시에 내가 올라 서 있던 바퀴달린 의자가 움직이면서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쳐 진 것이었다. 그 방엔 나보다 한참 어린 재수생밖엔 없었지만 그래도 남자였던지라, 나는 부끄러움이 밀려와 바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한참을 고꾸라져 있으니 걱정이 됐는지 그 예비 대학생이 나를 일으키러 왔다. 더욱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모든 일들이 잘 수습됐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채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책상 오른 쪽으로 슬쩍 초코 우유 하나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올려다보니 아까 그 예비 대학생이었다. 우유와 함께 그는 나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내가 소개했던 라디오의 사연에서는 서점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준 어떤 멋진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여성이 그 사람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런데 내 경험에서는 시험 공부에 지쳐 부스스한 어떤 여자(그것도 한참 연상)가 난방기를 끄다가 꺅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것을 도와주었을 뿐인데 어떤 이유로 남자는 연락처를 물어 온 것일까? 그것도 초코 우유와 함께 말이다.

왠지 민망하라 것 같아서 그 날 이후로 다시 방에서만 공부를 했는데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던 그 남자의 심리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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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래부터 이렇게 뻔뻔한 사람들은 아닌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양껏 시킨 조각 케이크며 쿠키의 달콤함에 취해서였는지, 연거푸 마신 커피 속 카페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른한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줄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상관없다. 깔깔거리며 웃고 믿을 수 없다며 야유하고 정말이라고 정색하는 동안 우리의 기분이 아주 상큼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 내 기분이 가장 산뜻했던 것은 친구들마저 두 손 들고 인정해 준 기분 좋았던 경험을 친구들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만에 경험한 이 일을 말이다.

시작은 새침대마왕 A양이었던 것 같다. 약속 장소였던 커피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호들갑을 떨더니 그녀는 말할 듯 말 듯 우리의 궁금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이후에야 드디어 입을 연다.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된다는 듯 연신 한쪽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면서, 지하철역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왔다는 어떤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커피숍 근처까지 따라오던 남자는 더이상 망설이면 안 되겠다는 듯 A양을 불러 세웠단다. 자신은 원래 이런 남자가 아닌데, A양을 보고 너무나 호감을 느껴서 용기를 내 말을 건다면서 괜찮으시면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자고, 귀엽게도 길거리 헌팅남들의 뻔한 레파토리를 읊어댔다는 그 남자. 용기는 가상하나 이상형에 전혀 가깝지가 않았고 우리와의 약속이 무척이나 중요(??)하여 정중하게 거절하고 돌아섰다는 A양은, 몹시도 흐뭇한 모양이었다.

얼마만에 받아 본 헌팅이냐고 우리는 그녀의 즐거운(?) 소식에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조각 케이크를 반쯤 먹었을까, 이번에는 묘한 웃음을 웃던 B양이 슬슬 입을 열기 시작한다. 어쩌면 연하의 남자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는 놀랍게도 중학교 교사이다. 얼마 전 재충전의 기간을 가지겠다며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학부 남학생으로부터 고백쪽지를 받았단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내 친구를 어느새 흠모하게 되었다는 그 남학생은 내 친구를 같은 학부생으로 봤단다. 대학을 졸업한지 어언 8년이 지났기에 설마 그럴리가 있냐며 믿을 수 없다고 우리는 야유했지만 B양은 정색을 하면서 핏대를 올린다. 요새 도서관에서 책읽는 재미에 빠져서 수업이 끝나면 늦게까지 각종 도서를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는지라 교감선생님 몰래 청바지를 입고 출근한 것이 한 몫을 했다는 것이 그녀의 변이다.


그 남학생은 물어보나마나 당연히 복학생(그것도 4학년, 재수 혹은 삼수를 했을지도 모른다.)이겠지만, 그래봤자 우리에게는 귀여운 막내 동생뻘일 것이다. 그렇기에 서른이 넘은 B양을 동생으로 착각했다니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덩달아 신이 나서 열량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달디 단 케이크를 마구 마구 먹었다. 연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으면 혼자서 5조각은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끼리끼리 노는 우리도 조금만 신경을 쓰면 대학생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으니 절로 신이 아니날 리 없었다.

다음 주에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는데, 연하남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B양은 당장 입고 갈 옷부터 걱정이라고 투덜댔지만, 엄청 설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 사실 나도 무척 흐뭇한 경험을 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 나는 모처럼 맘 먹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공들여 치장을 하고 집에서 나왔다. 여름 맞이 세일로 80%나 싸게 산 쉬폰 원피스를 처음으로 선 보이는 자리이기도 하고 오늘따라 피부 상태가 좋아서 화장이 쏙쏙 잘 먹기에 시간을 들여 화장에도 신경을 좀 썼다. 준비 시간이 길었던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물(내 외모)을 얻어서 샬랄라 즐거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집에서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많은 수의 여자들이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훔쳐보는(정말?) 것이 느껴졌다. 사실 여자들은 멋진 남자보다 예쁜 여자(내가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를 돌아볼 때가 더 많고 잘 꾸민 여자를 볼 때 저절로 눈길이 가게 된다. 오히려 여자들의 시선을 더 많이 받을 때가 '인정'을 받는 날이다. 나도 눈에 띄는 여자를 볼 때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쳐다보게 된 적이 많아서 그런 상황을 잘 안다. 그런데 오늘 나를 보는 여성들의 시선을 맘껏 느낀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 이유와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전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내가 나에게 느낀 만족도가 컸기 때문에 내 맘대로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길거리 헌팅을 받은 친구도, 연하남에게서 쪽지를 받은 친구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나를 인정해 줬다. 역시 그녀들도 여자의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남자들에게서 받는 시선도 물론 좋아하지만 같은 여자들에게서 받는 은근하고 묘한 시선이 더 좋다.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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