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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손님 같았던 택배 아저씨가 다녀 가시고, 나는 설레는 맘으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지름신께서 하사하신 앵두무늬 미니 원피스이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았지 실물은 처음이라 반갑게 첫인사를 건내고 후다닥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고양이 세수만 겨우 하고 오전내내 빈둥대고 있다가 갑자기 헤벌쭉해져서는 원피스에 팔이며 머리를 끼워 넣는 내 모습, 누가 볼까봐 무섭다. 그래도 좋다고 히히덕대면서 전신 거울 앞에선 내 모습을 확인하는데, 뭐지? 이, 싸한 느낌은??

사건은 이틀 전 밤 9시~12시 사이에 일어났다. 이번주까지 반드시 써야 하는 글이 있기에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글을 쓰지 못했다.) 정작 아무런 처리는 하지 않으면서 고민과 생각만 많은 나는야 A형, 직장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늘 생각이 그 글에 가 닿을 때면 불안함에 몸을 떨었었다. 그 날 밤에도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머리로는 써야 할 글의 소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깜박깜박 커서는 움직이는데 째깍째깍 시간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책상 위에는 바나나 껍질 두 개와 체리씨앗 약 서른 개, 눈 깜짝 할 사이에 먹어 치운 것이 틀림없은 초코파이(너는 왜 그리도 작아진 것이니?) 봉지만 덩그러니 놓였고, 역시나 모니터 속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다. 우울해진 나는 슬그머니 인터넷 창을 띄운다. 친구에게서 추천을 받아서 알게 된 여자 옷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이다. 어릴 때부터 예쁜 옷을 너무 좋아해서 끼니는 김밥으로 떼우면서도 사시사철 때때옷을 거른 적은 없다. 옷을 꼭 사지 않아도 여기 저기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난 날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산 옷이 몇 달 만에 온라인에서 1/3 가격으로 팔리는 것을 본 이후로는 인터넷으로만 옷을 사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온라인 쇼핑의 고수라 자부하고 있던 차였다.

친구가 알려 준 쇼핑몰은 정말 아기자기 하면서도 맘에 들었다. 그동안 나는 대형 쇼핑몰에서만 옷을 사 봤기 때문에 그 곳은 나에게는 신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야외와 커피숍, 극장 등에서 일상 생활을 찍은 듯한 옷 사진도 그렇고 모델의 포즈와 표정도 정말 예뻤다. 연예인은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자신을 뽐내고 있는 모델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구와 같았기에 나는 그녀가 입은 옷뿐만이 아니라 머리 모양, 화장법, 액세서리 등도 세심하게 잘 관찰했다. 당연히 잘 배워두면 써 먹을 일이 있겠지 하는 맘에서다. 외투에서부터 바지까지 그 쇼핑몰에 있는 모든 옷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그 분'이 오셨다.


예쁜 옷들이 너무 많아서 고르고 또 고른 후에 겨우 하나를 정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앵두무늬가 앙증맞게 찍혀 있는 미니 원피스였다. 민소매 원피스라 약간 부담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을부터는 가디건을 하나 더 입으면 꽤 오랫동안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고심끝에 선택했다. 간단히 결재를 마치니 뿌듯함과 함께 피로가 밀려왔다. 너무 오래, 너무 자세히 쇼핑몰을 훓어 보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고 손목과 어깨도 뻐근했다. 해야할 일은 시작도 못한 채 간식만 실컷 먹고 옷만 산 것이다.

드디어 앵두 원피스를 입고서 거울 앞에 섰는데, 모델이 입던 그 옷이 맞나 싶었다. 내 팔뚝이 이렇게 굵었던가, 미니 원피스인데 길이는 왜 이리 어중간한 것인가. 인터넷 쇼핑의 고수인 내가 실수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급기야 생쇼가 시작됐다. 감지 않아서 부스스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았다. 구두를 신고 맨얼굴에 립스틱을 바르는 등 별별 짓을 다 한 끝에서야 실수를 인정했다. 잘못 산 것이다.


다시 찾아본 인터넷 쇼핑몰, 낮에 보니 옷이 그다지 예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 눈을 홀렸던 것은 옷이 아니라 '모델의 외모'였던 것이다. 모니터 속 그녀는 아마 누더기를 입었어도 예뻤을 것이다. 사이트를 뒤져서 그 모델의 정보를 보니, 아뿔싸! 170센티의 키에 몸무게는 50kg이란다. 나는??? 옷을 살 때는 모델이 아니라 '옷'에 집중했어야 됐는데, 모델의 표정, 화장법, 머리 모양에 마음을 뺏겼으니 제대로 된 선택을 했을 리 없었다. 속이 상해서 굵은 펜으로 웃고 있는 모델의 얼굴을 까맣게 칠해 버렸다. 이따가 모니터를 닦아 내려면 속 꽤나 상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후련하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는 두 가지만 기억하자, 속지 말자 사진발, 보지 말자 모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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