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리던 전화벨 저쪽 너머엔 분명히 잔뜩 찡그린 후배의 얼굴이 있을 것이다. 잠결에 손만 뻗어 받은 전화였지만, 그녀가 한 말이라곤 고작 '여보세요'가 다였지만 그 한 마디에 실린 한숨의 무게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폭발 직전의 그녀와 마주앉아 있는 듯 했다. '왜, 또.' 앗 실수다. 순전히 자다가 깨서 엉겁결에 나온 말이지 나는 그런 심드렁한 말로써 전화 건 사람을 힘빠지게 만드는 그런류의 사람이 아니다. 실수로 내 뱉어진 말때문에 나는 잠까지 확 달아났지만 다행히 후배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의 물꼬를 터 주니 후배는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통화를 하는 동안 '응,응'만 하면서 들은 얘기가 어찌나 충격적인지 후배의 목소리가 조금만 장난스러웠더라면 거짓말이라고 단정지을 뻔 했다. 그러나 만우절도 아닌데 허튼 소리를 하려고 휴일 아침부터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지 않은가. 총 오십 육분 동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분노에서 시작해서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다는 것으로 끝을 맺은 그녀와의 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어이를 넘어서서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간호사인 내 후배는 교대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사는 자취방 문을 열었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더란다. 다른 날보다 좀 더 피곤해서 그렇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뒷머리가 쭈뼛 서는 경험을 했단다. 아무도 없어야 할 자취방에 어떤 여자가 화장대에 여상스럽게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요상맞은 여자가 쓰고 있었던 화장품은 후배의 것이었고, 한창 화장 중이던 그 여자 역시 어깨가 들썩여질 정도로 깜짝 놀라더란다. 너무 놀란 후배는 비명마저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띄며 뒤를 돌아보는 그 여자는 다름아닌 주인집 아주머니였다고!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들어오나봐'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주인집 아주머니, 화장대에 닿은 아주머니의 흔적만 없었다면 꿈인 것 같았단다. 사실 몇 달동안 계속 옷장 속의 옷들이며 화장품 등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설마 했었는데 오늘 덜미를 잡은 것이란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문 밖을 나가버린 주인집 아주머니를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나도 자취 생활을 해 봤기에 후배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일이었던지 평일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방에서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잠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찮은 마음에 열어 주지 않고 계속 잠을 잤었다. 그런데 잠시 후 철컹하며 문이 열리더니 주인집 아주머니가 들어오신 것 아닌가. 너무 놀라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더니 아주머니는 수도가 잘 나오는지 보러 오셨다며 너무도 당연하게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 줘야 하는데 마침 집에 있었네 하셨다. 손에 들린 열쇠꾸러미를 보니 우리집 뿐만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같은 건물의 모든 집에 자유롭게 드나드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언젠가는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가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에 서 있는 아주머니와 마주친 적도 있다. 그러니 후배가 겪은 이런 황당한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자취방을 경영(?)하는 아주머니의 입장에서는 관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보조 열쇠가 필요하겠지만 세입자 입장에서는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들어 사는 동안에는 나만의 집이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그토록 쉽게 문이 열릴 수 있다니 말이다. 이런 황당한 경험을 했으니 아마도 후배는 집을 옮기게 될 것이다. 부디 다음에 이사하는 곳에서는 조금 더 상식적인 주인 아주머니를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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