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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자마자 동생이 침대 위로 집어 던진 것은, 다름아닌 '은,희,경,소,설,책'이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닌 내 '책'을, 다른 작가의 것도 아닌 '은희경'의 소설을! 감히 집어 던지다니, 이것은 나에 대한 도전임에 분명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즉각 전투태세를 취하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을 무섭게 노려봤다. 나는 누가 내 서랍을 헤집어 놓아도, 소파 위에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어도 별로 게의치 않지만 유독 책에는 유난을 떠는 습관이 있다.

책을 사서 읽을 때에도 책장을 조심조심 넘기고 혹시나 책장이 접히거나 표지가 더러워지는 꼴은 차마 볼 수 없다. 그래서 왠만한 친구들에게는 책을 잘 빌려주지도 않지만, 어쩌다 빌려 준 책에 허락없는 밑줄이 그어져서 돌아올 때면 난 즉시로 야수로 돌변하여 친구를 몰아세우게 된다. 그런데 내 동생은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책을 패대기를 쳤다. 게다가 '은희경' 소설을!

지금도 물론 무지하지만 문학의 'ㅁ'도 모르던 대학 시절 처음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작가가 바로 은희경이다. 특히나 우울할 때 그녀의 책을 읽으면 '세상 그 까짓 것' 왠지 모를 씩씩함이 생기곤 했다. 첫 정이 무섭다고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로도 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은희경의 책에는 특별한 울림이 느껴져서 좋다.



'아니, 심심해서 읽었는데 괜히 정신만 사나워지고, 끝까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더라고. 책 읽느라 시간 버려, 생각하느라 머리 아파, 심술이 안 나게 생겼어? 이 여자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동생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듣고 나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공대 출신인 내 동생이 집에 사 들인 책 목록을 보면, 아침형 인간 등의 자기 계발책, 1년 동안 10억 벌기 등의 경제 관련책, 설득의 심리학 등의 처세술책 등이 대부분이다. 하다 못해 '어린 왕자'를 읽고 나서도 '그래서?'라고 묻던 동생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동생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가장 큰 까닭은 그것이 어쩌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숙제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읽은 문학을 제외하곤 단편 소설하나 스스로 읽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대로 읽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문득 예전에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수능 시험을 끝내고 시간을 그저 소모하고 있을 때, 같은 교회에 다니던 대학생 오빠에게서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그러나 당시의 내 지적 수준은 너무나도 낮았기 때문에 그 책의 가치를 알아 보지 못했다.(솔직히 고백하건대 지금까지도 그 책이 왜 그토록 좋은 책이라고 추앙받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 무지한 눈으로 읽는 상실의 시대는 그저 '야한 책'에 불과했고 내 동생이 그랬듯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작가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자 나는 나에게 그 책을 선물한 그 오빠의 인격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에게 억울하게 '변태'로 낙인찍힌 그 오빠를 멀리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됐을 때, 내가 은근히 동경하던 여자 선배에게서 상실의 시대에 관한 서평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단순히 야한 책인 줄로만 알았던 그 책이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책이었다는 것을 그 때야 알게 되었다. 이미 책을 버린 지 오래라 나는 다시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어 봤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어서 그랬는지 처음에 들었던 거부감은 없어졌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큰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게 나의 문학 지수라고 생각한다.

밥 한 그릇 먹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문학은 뭔 놈의 문학이냐고, 배 부른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나를 질타하실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자기 계발책을 한 권 더 읽어서 유능한 인재가 돼야지 말 장난에 불과한 소설 나부랭이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려울 수록 잊으면 안 되는 것이 기본이고 배 고플 수록 채워야 하는 것이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 한 줄을 읽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세상 살이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시 한 수 읽는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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