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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윷놀이 경기를 열기로 한 설날 저녁이다. 식구가 너무 많은지라 떡국은 가족별로 집에서 먹고 윷놀이 시합은 우리집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져 있는 외갓집에서 하기로 했다. 외갓집에 들어서니 미리 모여있는 며느리들에 사위들까지 이미 북새통이었는데 한쪽 방에서는 꼬마 녀석들이 벌을 서는 중이었다. 야단을 맞은 모양인지 우리 가족들이 들어서는 대도 뾰루퉁해 있었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설날 저녁부터 저러고 있을까 궁금해하다가 이내 답을 찾고는 푸시식 웃음부터 터뜨렸다. 안방의 한 쪽 벽면에 전에 없던 추상화가 한 가득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낙서를 했는지 빈틈이 별로 없었다. 색색깔로 그려져 있는 사람 얼굴, 동물 얼굴과 한글을 모방해서 만든 듯 한 요상한 글씨들까지...... . 새로 벽지를 바르지 않고선 절대 원상태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의 등장으로 아이들의 벌도 사면을 받았는데 녀석들은 벌써 기력을 되찾았는지 헤헤거리면서 또 이 방 저 방을 우르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마도 벌을 받을 땐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야 빨리 용서 받는 다는 것을 알고 눈치껏 연기를 한 모양이다. 영리한 것들!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니 잠시 과일을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동안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이서(나이는 5살 안밖이다.) 벽지를 도화지 삼아 그림 그리기 삼매경에 빠져 버렸단다. 도배한지 얼마되지 않는 데다가 그림을 그린 도구가 사촌 언니의 샤넬 립스틱을 포함한 값비싼 화장 도구들이라 가중죄가 적용됐다.

자연스레 화제는 '아이들이 자랄 수록 집안이 황폐해진다'는 것으로 옮겨갔고 다솔이(5개월)가 자라 보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금방 깨닫게 될 것이라고 잔뜩 겁을 주었다. 4살, 5살 연년생 형제를 키우는 사촌 언니가 가장 큰 한숨을 쉬었고, 말괄량이 딸아이를 둔 덕에 아들 둔 엄마 못지 않은 수고를 하고 있다는 사촌 오빠도 거들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가전 제품이며 살림 살이가 남아나질 않는데 그런 것들이야 고장나면 다시 살 수 있지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아이들의 안전이란다.

그래서 서랍들의 손잡이는 모조리 빼고 가스레인지 손잡이도 빼고 냉장고 문처럼 여닫이는 다 묶어 놓아야 한단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이 벽에다 낙서를 하는 것 정도는 눈감아 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어릴 땐 자꾸만 벽에다 낙서를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의 창의성이 개발될 것 같기도 해서다.

나는 다솔이의 방을 꾸밀 때 아예 낙서를 할 수 있게끔 만드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다솔이의 방은 이렇다. 신랑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자 아이들은 요새 만들기를 좋아하과 구석지고 약간 어두운 곳에서 놀기를 즐긴다니까 침대 아래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천장은 구름이 떠 있는 하늘 모양으로 도배를 해 주고 싶다. 그리고 벽면엔 낙서가 지겨워질 때까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큰 종이를 붙여주고 싶다. 대신 꼭 크레파스로만 그리기로 약속을 하고 말이다.

지금 내가 가장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이들 방의 벽지인데 예전 내 방은 그냥 모든 면을 똑같은 벽지로 발랐었다. 그런데 다솔이 방에는 가능하면 구간을 나누어서 다른 벽지를 발라주고 싶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면엔 귀여운 인형들이 가득한 벽지를 또 다른 면엔 숲이 울창한 벽지를 또 한 면엔 파도가 넘실거리는 벽지를 말이다. 물론 아랫 쪽에는 낙서를 할 수 있도록 큰 종이를 붙여야되겠지. 아이 방을 생각하다가 내 상상력과 창의성까지 저절로 길러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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