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인 지 모른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책을 읽은 것이. 남편이 육아책을 한 보따리 선물(?)해 주어서 숙제하듯(뭐,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서도) 읽거나 남편의 책장에 꽂힌 경제, 경영 책 중 제목에 끌리는 것들만 골라서 읽다가 포기하다가를 반복했었다. 나를 위한 책,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은 어떤 게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막연히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워낙 오랫동안 책을 안 사다 보니 요즘 나온 책 중에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자신있게 고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솔이가 이유식 할 때가 돼서 관련 책을 고르려고 인터넷 서점에 들렀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작가다.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부터 귀가 닳도록 듣던 문제작인데, 이삼십대 여성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로 통했다. 돈이 궁하던 시절이었기에 되도록 도서관에서 빌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워낙 인기있던 책이라 2년이 넘도록(!!!) 대출에 실패해서 결국 사서 봐야 했던 책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고 나서는 나도 스스로 '정이현' 전도사가 됐는데, 최강희, 지현우, 이선균이 출연했던 동명의 드라마는 최강희의 머리 모양과 옷 입는 스타일만 유행시키곤 쫄딱 망했었다. 그 정이현 작가가 새로운 소설 <너는 모른다>를 내 놓은 것이다.
앗싸 가오리! 어떤 제품이 좋을 지 모를 땐 명품을 구입하면 되듯, 어떤 책이 재미있을 지 모를 땐 아는 작가의 책을 사면 된다. 아기 이유식 책은 뒷전으로 하고 나는 얼른 이 명품책을 구입했다. 얼마 후 책이 도착했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첫장을 열었다.
배신! 처음 몇 장을 읽고나서 내가 느낀 감정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나서 너무 감탄해서 정이현 작가의 다른 소설도 모두 찾아 읽어 봤다. 그랬기에 나는 그녀의 소설이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녀 특유의 적나라한 냉소가 때때론 내게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소설은 이전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배신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음울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뒷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한 번 펼친 책장을 쉽사리 덮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 미안했지만 딱 하루만 다솔이에게 불량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젖만 물리고 나머지 시간은 되도록 오래, 되도록 많이 자게 한 후 다솔이와 놀아주는 대신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길 수록 이야기 속에 깊이 빠져들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더욱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됐다. '배신'이라던 생각은 '역시'라는 감탄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진짜 진짜 진짜 재미있었다. 이 소설 속에는 참 다양한 상처를 숨기고 살아온 사람들이 나온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서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에 속으로만 앓고 있다. 이혼과 재혼의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에 생겨버린 어쩔 수 없는 생채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스스로도 가벼운 상처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속으로 곪고 터지기를 반복하면서 몸 전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드러내기 싫은 속내까지 철저하게 보여진 이후에 바닥까지 내려갔던 뭉개진 자존심도,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가족간의 사랑도 다시금 되찾게 된다.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모든 내용을 공개해 버리면 안되니까 두루뭉술하게 썼지만 결론은 아주 재미있다는 것!
비록 영화 <올드보이>처럼 볼 땐 너무 재미있어서 감탄을 했지만 다 보고 나서는 마음 속에 무언가 묵직하고 찜찜한 것이 남는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나처럼 재미있는 소설책을 찾아 헤메는 분들께 자신있게 권해드린다.
'세상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들은 왜 순진한 남자를 폭탄이라고 부를까? (0) | 2010.02.02 |
---|---|
그럴싸한 공간엔 늘 '러그'가 있다. (0) | 2010.01.25 |
올해 다시 대학생이 됩니다. (4) | 2010.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