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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듣기엔 거짓말 같은, 주민등록번호가 두 개인 사람이 실제로 있다. 그것도 꽤 많이...... . 이미 짐작 하셨겠지만 그 운 없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 후 혼인신고를 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써 왔던 주민등록번호가 실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주민등록번호가 틀렸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결혼을 한 후 혼인 신고를 할 때 여자들은 '호적'을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옮기게 되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호적상에 기재 돼 있는 주민등록번호가 주민등록등본이나 주민등록증에 기재 된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사무소에서는 먼 옛날(?) 내가 출생신고를 할 당시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게 됐는지 지금은 당연히 알 수가 없기에 나는 이 억울한 상황을 하소연 할 대상이 없었다.

호적에 써 있는 낯선 주민등록번호와 지금까지 써 온 익숙한 주민등록번호. 사람은 한 명인데 번호는 둘이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이 상황에선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는 말만 멍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행정 기관에서 잘못한 일인 것 같은데, 그 때 그 기관도 아니고, 그 때 그 사람도 아니니, 웃는 낯으로 지금은 혼인 신고를 할 수 없다고 친절히 설명을 해 주는 동사무소 직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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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6883 pairs of scissors on the wall, 5376883 pairs of scissors, take one down, pass it around, 5376882 pairs of scissors on the wall by Bright Ta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설명을 들어 보니 주민등록번호를 택일 해야 된단다. 그런데 호적상에 있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 낯선 번호를 사용한다고 정하면 그 즉시 번호가 바뀌게 되고, 지금까지 써 왔던 틀렸지만 익숙한 옛 번호를 쓰려면 재판을 해서 바로 잡아야 된다고 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재판'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아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될텐데, 나는 왠지모를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낯선 번호를 택했다. 나이 서른에 주민등록번호를 다시 외워야 할 상황에 이르렀지만 번거롭지 않는 편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주민등록번호를 바꾸자마자 내가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아진 것이다. 기분 좋은 일은 주민등록증에 새로 찍은 잘 나온 사진을 넣을 수(공짜로) 있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내가 거래하고 있는 모든 은행의 고객 정보를 바꾸어야 했고,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했으며, 주로 이용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도 연락을 해야 됐고, 얼마 동안은 새로 가입하려고 했던 인터넷 사이트에서 바뀐 주민번호와 실명을 연관짓지 못해서 애 먹었고, 주민번호가 헷갈려 이상한 사람 취급도 받았다.

그 이전까지의 내 모든 기록이 깡그리 사라지게 됐다.

Colorful Chaos
Colorful Chaos by Darwin Bell 저작자 표시비영리

그 무엇보다 가장 속이 쓰렸던 것은 새로 받은 주민등록번호의 생일이 예전 것 보다 빨라서 내가 가입해서 이미 십 년 넘게 부었던 여러 개의 보험료가 갑자기 인상돼 버린 것이다. 앞으로의 보험료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간 것들까지 일시불로 정리해서 오십 여 만원을 더 내야만 했다. 모든 기록을 다시 쓰고 돈까지 더 내야될 줄 알았더라면 재판을 해서라도 예전 주민번호를 지키는 건데, 후회스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추측하건대 앞으로도 나와 같이 주민번호를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나처럼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말고, 상세히 따져서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내 잘못도 아닌 상황에서 내가 본 피해가 크다면 큰데, 이걸 보상받을 길은 진짜로 없다는 말인가? 만약 있으면 그 방법을 아시는 분은 꼭 좀 가르쳐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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