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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경기가 끝났다. 한 쌍의 페어 스케이팅 커플이 낭만적이고도 멋진 경기를 끝낸 후 관객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담뿍 담아 인사를 건넨다. 숨죽이며 그들의 연기를 보고 있던 관객들은 그제서야 안심을 하며 맘껏, 소리높은 환호를 쏟아낸다. 페어 스케이팅은 곡예 묘기 동작이 포함돼 있어서 보는 이들을 더욱 긴장시키기 때문에 관중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자신이 응원하는 커플이 나오기라도 하면 너무나 아찔하고 걱정스러워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성공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난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데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인사를 마친 후 남자 선수가 돌연 한쪽 무릎을 꿇고 빙판 위에 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사전에 이야기가 없었던 듯 경기 진행팀들은 당황했으며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웅성거렸다. 당황하긴 여자 선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얼마 후 전광판에 남자 선수의 입모양이 잡히고 곧 상황을 파악한 관객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Yes, Yes, Yes, Yes...... .'

대회 도중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자 선수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마침내 여자 선수도 'Yes'라고 대답했고 그들은 눈물과 환회가 섞인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게 되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이 이야기는 '레나 이노우에'와 '존 볼드윈'의 실화이다. 페어 스케이팅은 환상적인 호흡이 경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수들이 실제 연인이나 부부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케이팅은 대개 어린 나이에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한 번 짝을 이루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줄곧 같은 사람과 연기를 하므로 이들은 가장 훌륭한 동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일 수밖에 없다.

페어 선수들은 은쟁반 위에서 때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때로는 냉담한 이별을 연기하는데 사력을 다해 감정을 표현하기에 진짜 사랑이 싹 트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 오랜 시간을 함께 연습 해 왔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천상의 페어 스케이팅 커플이라고 불리던 '예카테리나 고르디에바(애칭: 카티아)'와 '세르게이 그린코프'도 실제 부부사이였다. 내가 부부사이였다고 말하는 까닭은 세르게이가 28세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카티아가 10살, 세르게이가 14살일 때 이 둘은 처음 짝을 이루었는데 세계 선수권 우승 4회, 올림픽 금메달 2개라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게 된다. 이들은 1991년에 결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고 행복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신이 질투를 했는지 가슴 아픈 결말에 이르게 된다.


 

1995년 연습을 하던 도중 세르게이가 아이스링크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의사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심장에 결함이 있었다고 밝혔다. 카티아는 갑작스레 닥친 시련으로 인해 실의에 잠겼고 언론은 그녀가 다시는 스케이트를 신을 수 없을 것이라고 수근거렸지만 3개월 후 그녀는 새로이 얼음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그러나 기억 속에 있는 세르게이와 함께 그를 추모하는 공연을 연 것이다. 이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아픈 선물이 되었고 이후 그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텔레비전 방송으로 무수히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카티아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됐지만 사람들은 '예카테리나 고르디에바'와 '세르게이 그린코프' 커플의 환상적인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 참가한 페어 선수들 중에도 은쟁반 위에서 열연을 펼치다 실제 부부로 발전한 팀이 꽤 있다. 이번 대회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중국의 '쉔 슈에'와 '자오 홍보'도 자오가 빙상 위에서 청혼 해 결혼에 이른 닭살 부부인데 벌써 20년 째 함께 할동하과 있는 노련한 팀이다. 쉔-자오 팀은 은퇴했다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복귀했는데 대단한 실력을 선 보이면서 돌아와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같은 중국의 페어 팀인 '장 단'과 '장 하오' 선수도 부부인데, 이들은 4대륙 피겨 선수권 페어 쇼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다. '장-하오' 팀을 떠올리면 토리노 동계 올림픽 때의 그 아찔한 장면도 어김없이 기억날 것인데 그들이 빙판 위에 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공중 4회전을 하고 착지하던 장 하오가 무릎을 얼음판에 강하게 찧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공중 회전 이후 일어난 일이라 그 충격은 엄청났을 것이다. 지독한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 모두들 무릎 골절이 의심될 정도로 큰 사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하오는 경기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관객들의 격려 속에서 연기릘 재개, 결국 은메달을 목에 걸게 됐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멋진 경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부부인지 연인인지 알 수는 없으나 너무나 잘 어울려서 진짜 사랑하는 사이였으면 싶은 팀도 있다. 우리 나라는 페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때로는 감미롭게 때로는 아찔하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이들의 아름다운 경기 장면을 보면서 조금은 여유롭게 우승팀을 점쳐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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