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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유가 생겨서 오랫만에 엄마와 함께 수영장에 다녀왔다. 나는 이번 엄마와의 나들이에 수영장을 고집했고, 엄마는 수영도 못 하면서 물놀이를 좋아한다는 다 큰 딸의 어리광에 못 이기는 채 따라와주셨다. 한 겨울에, 그것도 엄마와 함께 간 곳이 수영장이라니 참 성격도 독특하다 싶으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져서 한 겨울에도 수영복을 입은 채로 뜨끈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비수기인 덕에 가격까지 저렴해졌으니 물놀이를 즐긴다면 겨울 수영장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굳이 수영장을 고집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엄마께 한쪽 '가슴'이 없이도 수영장에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방암을 앓으신 후 엄마는 암과의 싸움에서 가슴 하나를 잃으셨다. 여자에게 '가슴'이 어떤 존재인지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모두들 다 아실 것이다. 봉긋한 '가슴'은 여자에겐 아름다움이고, 자존심이며, 여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이제 엄마에겐 가슴이 없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상실감에 시달렸을 엄마. 이런 엄마를 세상 밖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같은 여자이며 딸인 나밖엔 없다.

수영장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내색은 안 했지만 나 역시 너무나 떨리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드문드문 보였고 우리는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고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우리는 가슴을 잃기 전과 마찬가지로 온종일을 신나게 놀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으셨기에 엄마는 놀며 쉬며를 반복하셨지만 확실히 자신감은 얻으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물놀이가 다 끝나고 샤워를 할 때 발생했다.

사람들이 샤워장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샤워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영복을 입었을 때에는 특수브라를 착용하고 계셨기에 겉보기로는 엄마의 상태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샤워할 땐 당연히 그 브라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내가 샤워용품을 가지러 간 동안 엄마는 미리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서둘러 돌아오면서 그 모습을 본 나는 정말 울컥했다.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신 엄마는 오른쪽 맨 끝 자리에서 몸을 최대한 벽쪽으로 올리신 채 벗은 수영복으로 환부를 가리고 계셨다.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두려우셨던 것이다.

겨우 샤워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다쟁이로 돌아가서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엄마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뒷모습은 말을 하지도 않고 심지어 표정도 없지만, 엄마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슬펐다. 그래도 세상으로의 첫 발을 성공적으로 디디신 엄마. 엄마의 용기가 정말 자랑스럽다. 가슴 복원 수술은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암 수술과 동시에 복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2천만원 정도가 든다.) 위험도 따르기 때문에 엄마는 이제 더 큰 용기로써 자신을 무장하셔야 된다. 엄마가 다시 공중 목욕탕에 가실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여성 암 발병 1위인 유방암 환자에 대한 복지가 너무 안 돼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

이번에 엄마와의 나들이를 준비하면서 유방암 환자용 수영복을 찾아봤는데,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봐도 마땅한 것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다. 결국엔 일반 수영복 안에 특수 브래지어(속옷)를 입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복 특성상 속옷이 보이기 때문에 엄마는 위에 민소매 티셔츠 형식으로 된 수영복을 또하나 입으셨다. 많이 불편하셨을거다. 또한 한쪽 가슴에 실리콘을 넣어 모양을 잡아주고 척추 질환까지 예방하는 환자용 특수브라는,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가볍고 편한 것으로 사려면 정말 큰 돈이 든다. 그것도 판매하는 곳이 흔하지 않아서 병원 접수대에 놓인 광고지를 보고 구입한 것이다.(엄마의 것은 아주 좋은 것이 아님에도 하나에 50만원이다. 치료 과정에서 살이 빠지셔서 1년 사이에 속옷 값만 100만원이 들었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다니면서 느낀 건데, 유방암 환자들이 정말 많았다. 유방암은 다른 암에 비해 생존율이 높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유방암은 '쉬운 암'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과정을 모두 지켜 본 다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지라도 환자의 삶의 질은 현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서의 삶에 큰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유방암. 생각보다 젊은 환자들도 많은데, 이 병 때문에 평생 컴플랙스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빨리 복지 사업이 활발히 되고, 유방암 환자의 삶의 질을 위한 다양한 소품들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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