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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피곤했던 탓에 버스 안에서 잠시 기대에 쉬고 있었는데 건너편 옆자리에서 할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있는대로 툴툴거리셨는데, 그와는 별개로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방으로 가서 전화기 옆을 보라는 할머니의 심술궂은 대꾸를 들으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젊었을 때부터 몇 십년 동안 남편이 OO어디있어? OO는? 이라고 물어 봤을 것 아닌가?

남편의 출근 준비로 한창 바쁜 우리집의 아침, 남편이 갈 곳 잃은 새처럼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또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인데 잘 찾아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차마 못 물어 보고 계속해서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남편이다. 으이구--하는 소리가 목까지 차는 순간이었지만 모르는척 눈을 돌리다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수건 아래에 빨간색 휴대전화 끄트머리가 보인다.

이거?
남편의 눈 앞에 휴대전화를 대령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이어지는 남편의 보물찾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는 대개 아침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부처님 손바닥 처럼 나는 남편이 다음에 찾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알면서도 척척 대령해 주지 않는 것이 남편은 서운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스스로' 단번에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는 연습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잘 해 두는 편은 아니지만 양말, 속옷, 아기 기저귀, 손수건 등등은 늘 같은 서랍장 안에다 넣어 둔다. 이를 테면 양말은 작은 서랍장의 가운데 칸에, 아기 손수건은 아기 서랍장의 세 번째 칸에 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침마다 '여보, 양말 어디있지?'를 하염없이 외쳐댔다. 남편은 늘 느즈막히 출근 준비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2~3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기 때문에 늦도록 잠을 못자고 시달렸던 탓에, 나는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해도 눈을 반쯤 감고 비몽사몽 아침상만 겨우 차려 주었었는데, 그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 '여보, 양말 어디있지?'는 결국 나의 버럭질을 유발했다.

결혼한지 햇수로 3년 째. 그동안 버럭 버럭 몇 번을 했더니 남편은 무언가를 찾아야 될 때 나에게 어디 있는지를 묻는 대신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 보거나 냉장고와 냉동실을 번갈아 가며 몇 번씩 열어서 원하는 것을 찾곤 한다. 미안하게...... .

paper heart
paper heart by tuli nishimur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대신 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할 땐 조금 더 친절해 지는데,
여보, 아기 서랍장 맨 윗 칸 오른 쪽에 보면 가위 손톱깎이가 있어. 그거 좀 가져다 주세요.
여보, 냉장고 문 열면 문쪽에 양념통 가득 들어 있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케찹 좀 꺼내 올래요?
...... .

문득 뜨끔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고 업무 시간에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도,
집에 있다가 갑자기 컴퓨터가 말썽이라고 징징대며 전화를 했을 때도,
생수통에 물이 떨어졌다고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을 때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그 쉬운 버럭질도 없이) 차근차근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었다.

남자와 여자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들이 기록된 갖가지 심리서적들을 섭렵했음에도 이렇게 이해심이 부족하다니!(뜬금없는 반성의 시간이다.) 버스 안에서 나를 씽긋 웃게 만들었던 휴대전화 속 할아버지처럼 남편이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물어 올 지라도 나는 너그러히 대응해 주어야겠다. 물론 나도 어찌할 바 없는 버럭질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등장할 지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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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부부싸움은 며칠 지나면 왜 다투었는지, 정말 다투긴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소소한 이유 때문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화성에서 왔느니 금성에서 왔느니 식상하게 다시 이야기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다르게 살아 온 두 사람이기에 늘 쿵짝이 잘 맞을 수는 없고 가끔씩 욱하거나 꽁해질 때가 있다. 오히려 욱할 땐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하니까 일이 쉽게 풀리지만 꽁할 때가 문제다.

작은 삐걱거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이야기 하는 것이 치사하게 느껴져서 속으로 삭이는 순간, 곧 우리 부부의 전쟁은 시작된다. 내가 갑자기 입을 꼭 다물고 꽁해지는 것은 곧 선전포고이며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싸움이라고 해 봤자 별 것 없다.

나는 나 대로 남편은 남편 대로, 각자 자신의 컴퓨터만 노려 보면서 몇 시간이고 버티는 것, 침묵하는 것,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나도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 텔레비전에서 우스운 장면이 나와도 혀를 깨물며 웃음을 참는 것,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가 나도 '밥'이란 단어를 먼저 꺼내지 않는 것, 그러다 자신의 휴대 전화가 울리면 아무렇지도 않는 심상한 아니 쾌활한 목소리로 신나게 통화를 하는 것. 그래서 손하나 까딱 않고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것...... .

우리의 싸움은 오래 버티기 내기와도 비슷해서 더 많이 화가 날 수록 더 오래 꽁해져 있는데, 이럴 때 남편이 먼저 미안하다고 그만 화 풀라고 너스레를 떨어 주면 참 좋으련만 '당신의 행복은 나의 행복, 당신의 불행은 나의 불행'을 무슨 공식 처럼 외우고 있는 내 남편 님은 '당신의 꽁은 나의 꽁'으로 응수해 버리니 참 심란하다.

늘 그래왔기에 나는 내가 화를 푸는 순간 마법이 풀리듯 남편의 화도 풀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일정시간을 버티면서 스스로 속상했던 감정을 달랜 후에는 남편과 현명하게 화해하기에 돌입한다. 컴퓨터를 하다가 잠깐씩 남편을 쳐다보는 것, 책이나 달력을 보며 뜻도 없이 괜히 혼잣말을 하는 것, 간간히 웃는 것 그러다 다시 한번 남편을 바라 보는 것 등이 전쟁의 끝을 알리는 신호이며 이제 그만 휴전하고 싶다는 전갈이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깍둑깍둑 재료를 손질하고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면서 남편에게 간을 봐 달라고 한다. 나는 이미 남편의 식성을 잘 알고 있는 일등 아내이므로 평소에는 간을 봐 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지만 이럴 땐 찌개를 호호 불어 남편의 입가로 가져 가는 것이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밝은 음색으로 남편을 부른다. '당신의 행복은 나의 행복, 당신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공식이니 당신의 화풀림을 대입하면 당연히 나의 화풀림이라는 답이 나온다.

또 어떨 땐 뜬금없이 책을 읽겠다는 표현을 하면서 하필이면 꼭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한 책을 남편에게 좀 내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려진 책이 '명심보감'일 때도 있지만 당연히 상관없다. 나도 남편도 그 책의 제목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

한편 가장 쉬운 화해 방법은 역시나 아이를 이용(?)하는 것인데 둘이서 아기 목욕을 시키거나, 옷을 갈아 입히거나 발달 상황을 점검해 보거나 혹은 꺄르르 웃는 아기의 얼굴을 바라 보게만 해도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을 스르르 풀어 버리게 된다.

여자의 마음은 복잡한 실타래 같아서 그것이 꼬여 버리면 하나 하나 풀어내기가 어간 어렵지 않으나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엉킨 부분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 버리면 손쉽게 원상복구 시킬 수 있는 것 같다. 남자 친구나 남편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을 땐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이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웃고, 무언가를 같이하면 남자들은 어느새 전투 중이었음을 잊고 대답하고, 따라 웃고, 동참해 줄 것이다. 단, 사소한 다툼이었을 때에 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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