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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나를 폭발하는 남편의 대화법'이라는 글을 썼다가 '웃기네, 너나 잘 하세요'류의 덧글 폭탄을 맞았다. 행여나 나를 옹호해 주는 (큰절을 올리고 싶도록 고마운) 분들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소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 했던 고마운 분들의 덧글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삼일 동안 컴퓨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을 덮어 쓰고 반성에 또 반성을 했다.

무엇을???
나는 왜 이렇게도 글을 쓰지 못하는 가! 하는 것을...... .
가볍게 한 번 웃자는 의미로 쓴 글에,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시죠?'라는, '4주 후에 뵙겠습니다'가 언뜻 떠오르는 덧글까지 달린 것을 보면 올바른 대화를 못 하는 것은 남편 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네네, 당연히 저는 남편을 98% 사랑하고요, 다만 2% 부족한 남편의 대화 '기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제목에도 썼었잖아요,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대화법'이라고요.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글 아래에도 어쩌면 나를 울상짓게 만드는 덧글들이 가득 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곳은 내 블로그고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권한이 있으니까......
그런데 뭐지? 은근히 소심해지는 이 상황과 어쩐지 비겁해 보이는 이 변명들은?(참고로 내 혈액형은 A형이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자들은 역시 화성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홀로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여심을 감동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남편들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아내의 마음에 기름을 부어 결국 폭발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꾸만 '원인''해결책'을 제시해 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상황 1> 원인을 찾는 대신 공감과 이해를

자고 일어났는데 한겨울에 모기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한 두방 물린 것이 아니라 허리에 네 개, 다리에 세 개 물린 자국이 있어서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래도 간지러워서 벅벅 긁다가 나는 남편에게 모기에 물린 자국, 내가 벅벅 긁어서 더욱 벌겋게 부어 오른 자국을 보여 주며 '나 모기 물렸어"라고 말했는데, 남편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당신 어제 입었던 옷이 뭐지?' ----'몰라' 
'요가 갔을 때 입었던 요가복 그 옷 속에 모기가 살고 있나? ---- '어??'
'이불 언제 빨았어?'----'뭣이라???'

결국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모기에 물러 잔뜩 부어 오른 모습을 보여 준 까닭은 당장에 모기를 잡아서 죽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간지러움에 시달리니까 나를 좀 위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식구 중 나 혼자서 모기에 물렸으니까 그 윈인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했고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럴 땐, '많이 간지러웠겠다'. 딱 한마디면 되었을 것을...... .


<상황 2> 말 대신 행동으로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하면서 청소, 빨래, 음식 장만까지 혼자서 다 해야했던 내가 남편의 퇴근 하자마자 쪼르르 달려가서 어깨를 있는 대로 늘어 뜨리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집으로 좀 오셔서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그럼 당신이 회사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맞불을 놓아 나를 기막히게 만든다.

나도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전업 주부이므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잘 해나가는 것도 프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도 가끔은 불평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 유독 그 날따라 혼자서 전전긍긍 힘들었기 때문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게다.

이럴 땐 '힘들었지? 내가 많이 도와줄게'라든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아내는 맘이 녹아내렸다. 걸래질을 진짜 시킬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맘에 없는 말을 하기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면 차라리 없이 꼭 껴안아 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면 아내는 금세 생기를 찾게 될 것이니 말이다.



<상황 3> 맞장구, 혹은 말꼬리 따라하기

남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걸그룹을 보느라 헤벌쭉해진 남편을 보며 나는 인터넷에서 본 과거 사진과 함께 과거에 그 소녀가 사실은 좀 놀았던 언니 중 하나였다더라, 요즘에는 꼭 성형 수술이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주사로 시술만 받으면 이미지가 확 달라져서 예뻐진다더라, 나도 의학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누구 못지 않게 예뻐질 수 있을텐데...... 등등 내가 생각해도 쓸 데 없는 소리를 늘어 놓을 때

남편은 어디서 그런 소리를, 네가 봤냐며 정색하고 따져서 아내를 무안하게 만들기 보다는 아내가 하는 말에 '그래, 그래, 그렇다며?, 응, 그렇지, 얼씨구, 오호라!' 맞장구를 쳐서 아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여자란 때로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일도 좋아하고 자기가 연예인이랑 비교하는 자체가 이미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래도 한 번 무리수를 던져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맞장구를 치거나, 아내가 하는 말의 마지막 부분을 따라하며 반복하면(누구누구가 어릴 때 그렇게 놀았다던데? 하면 아,,,좀 놀았었구나. 나도 조금만 손 보면 엄청 예뻐질 수 있을텐데, 하면 그럼 엄청 예뻐질 수 있지. 하며 말꼬리를 따라하는 대화기술) 남편이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나를 엄청 대우해 준다며 감동받을 것이다.

아참!
내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나는 그저 이따금씩 여자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해서 내 속을 긁는 남편의 대화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짝, 찰떡궁합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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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해가 중천에 떠서 나를 빼꼼히 (햇님에게 진짜로 눈이 있다면 아마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 볼 때까지 쿨쿨쿨 자다가, 띠리링~ 울리는 문자 메시지 소리를 듣고서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애써 시계를 외면하고서 약간의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 잘 자고 일어났더니 피부가 좋아졌다는둥 역시 잠이 보약이라는둥 애교아닌 애교를 부릴 수 있었던 까닭은,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는 까닭이었다.어제 저녁에 양파와 마늘을 달달달 향기롭게 볶고 감자, 고구마에 닭고기까지 듬뿍 넣어 만들어 맛나게 먹었던 카레라이스가 아직도 한솥 가득 남아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대접에 밥을 넉넉하게 푸고 그 위로 카레를 보 기좋게 담으면 따로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로 훌륭한 아침 식사가 된다. 뜨끈하게 카레를 데우고 적당하게 잘 익은 배추김치 한 접시만 곁들이면 되니 식사 준비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잠기운을 눈가에 붙인 채 카레솥에 불을 올린 후 '식사하세요' 남편을 부른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돌아와 김치 접시를 식탁에 내려 놓는데, 끙끙끙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냄비 뚜껑을 열자 이미 하얗게 곰팡이 비스무리한 것이 노란 카레와 뒤엉켜 있다.
어제 저녁 딱 한 끼 먹은 카레가, 이 추운 겨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끓여 두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왜왜왜 벌써 상해 버렸는지 속상해 하고 있는데 남편이 식사를 하러 왔다. 어쩌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남편에게 카레가 쉰 것 같다고 어제 '팔팔'은 아니지만 '슬쩍'은 다시 끓여 두었는데도 쉬어 버렸다고, 그래서 아침은 '라면(그나마 소시지와 만두를 넣은)'을 먹어야 되겠다는 끔직한 소식을 전했다. 남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다른 냄비에다 물을 받아 가스불에 올리는데, 의기양양한 남편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렸다.

'나는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카레가 왜 쉬었는지 알아. 당신이 카레를 팔팔 끓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미생물은 100도 이상에서는 죽지만, 당신은 적당히 끓여서 오히려 미생물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 주었기 때문에 카레를 상하게 만들었어'



사실 남편에게는 말 하지 않았지만 어제 먹다가 남긴 카레를 그대로 카레솥에다 부었기 때문에 침이 들어가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말이 백번 옳다. 그러나 꼭 그렇게 따져야 했는지...... 하긴 되짚어 보니 남편은 위로를 구하는 내 말에 늘 이런식이었다.

몇 년 전
결혼하고 처음 맞는 '초복'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삼계탕을 끓였다. 그것도 시부모님까지 초대한 자리였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결혼초라) 어려운 시부모님 앞에서 혹여 실수라도 할까봐 끙끙대면서 닭 네 마리를 기적적으로 끓여 내 식사 대접을 했다.

맛있게 드세요.

닭다리가 잘 뜯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실패를 예감하면서, '복화술'로 슬쩍 남편에게 귓속말을 했다. 삼계탕이 좀 이상하지?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우렁찬 남편의 목소리,

응. 닭을 좀 더 끓여야 했어. 덜 익어서 닭다리에서 냄새나.

그 때 내가 웃었던가? 웃었대도 웃는게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나를 화나게 만드는 남편의 대화법은 수두룩 빽빽이다. 

아무리 화성에서 온 남자들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화법을 고수하는 족속들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닌 듯 싶다. '이해' 받길 원하고 '공감'해 주길 바라는 여자들의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도 몰라 주는지......

이 글을 쓰다가 나는 글을 한 번 날렸다. 다행히 자동저장 기능이 있어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시 불러올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복구시킨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왜 갑자기 내 글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는 내 이야기에 남편은 대답한다. 대답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는데도 굳이 대답을 한다.

당신이 뭔가를 잘못 건드렸겠지!

내 저 인간을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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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방에 콕!) 생활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살림과 육아에 전념한 지 너무 오래 돼서 인지,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무척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기에, 나와 비슷한 처지(하루 종일 말 없는 아기와 씨름하는)에 있는 '아줌마'들이 수다스러워 지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과도 스스럼 없이 얘기를 나누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듯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사람보다 '기계'를 더 선호할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잔돈'으로 무언가를 해야 될 때다. 예전에는 단 1원의 에누리도 없는 야박한 기계들을 미워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좀 다르다.

물가가 무섭게 뛰어 오르고 사람들의 돈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서 요즘 동전들은 홀대를 당하는 경우가 참 많은데, 남편만 해도 식당에서나 가게에서나 동전으로 계산을 하면 어쩐지 쩨쩨해 지는 것 같다며 늘상 지폐로만 값을 치르기 때문에 남편의 책상 위나 우리집 동전 통에는 거스름 돈으로 받아 온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동전으로 내는 것이 어때서?"

그 동전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나 나 밖에 없어서, 나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수북해진 동전 통을 깔끔하게 비우곤 하는데,

"모두 칠천 이백 오십 원이라고요? 여기 오백 원 짜리로 삼천 원이고요, 백원 짜리로 사천 원이에요. 그리고 이백 오십 원은 오십 원 짜리하고 십원 짜리로 드릴게요."

좀 심했나? 계산 하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도록 돈을 정리해서 따로 따로 주는 데도, 내가 동전으로 음식이나 물건 값을 지불할 때면, 느닷없는 동전 세례라는 듯 당황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어떨 땐 손님인 내가 물건을 사면서도 미안해 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동전이든 지폐든 가리지 않고 잘 받아 주고 알아서 척척척 남은 금액을 표시까지 해 주는 자동 판매기가 더 좋다는 소리다.

...... .


Dollars !
Dollars ! by pfala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여기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약속 시간에 쫒겨 타게 된 택시 안, 목적지까지는 기본 요금이 나오는 짧은 거리기 때문에 나는 미리 지갑을 열어 택시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쨍그랑 쨍그랑 역시나 그 속에는 동전도 포함이 돼 있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차가 조금 막혀서 생각보다 택시 요금이 약간 더 나왔다.

이천 팔백 원.

지갑을 탈탈 터니 백원 짜리 동전이 일곱 개, 오십원 짜리가 네 개, 십원 짜리가 다섯 개 있었다. 나는 늘상 하던대로 이천 원은 천원 짜리 지폐로, 나머지 팔백 원은 백원 짜리 동전 일곱 개와 오십 원 짜리 한 개, 그리고 십 원 짜리 다섯 개로 택시비를 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택시 문을 여는데,

" 아니, 이 아가씨가!!"

(아가씨라고 불러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만,)택시 기사 아저씨의 불호령에 화들짝 놀라 경기를 한 번 일으키고는 문으로 가져 갔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이미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으나 초연하게 모른 척 대응하기로 했다. 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노발대발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아저씨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도대체 왜 그러시느냐고, 저는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역시나 문제는 동전, 그 중 십원 짜리에 있었다. 이 아가씨(다시 한번 고맙습니다.)가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네, 아니에요.), 어떻게 택시 요금을 이딴 식으로 낼 수가 있느냐, 나를 뭘로 보고 십 원 짜리를 주느냐,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것이냐, 택시 운전한다고 사람을 놀리는 것이냐...... 폭풍같은 화를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목소리를 계속 높여도,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도 내가 흔들리지 않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여전히 낮고 평온한(사실은 조금 무서웠다.) 어조로 왜요? 십 원 짜리도 돈이잖아요. 십 원 짜리는 왜 안돼요?를 되풀이하자 아저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끝끝내 나에게 오십 원 짜리 하나와 십 원짜리 다섯 개를 돌려 주고는 이 돈은 안 받으니 가져 가라며 나를 택시에서 쫓아 냈다.  

씁쓸하게 동전을 받아 들고 아직 그치지 않은 비 속을 걸어 가는데, 왜 그리도 속이 상하던지, 정말 내가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이제 십 원 짜리를 받아 줄 곳은 피도 눈물도 없어서 절대로 에누리가 안 되는 자판기 뿐인가?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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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는 책,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은 연애 시절에 샀던 소설이다. 사귄지 얼마되지 않아서 샀던 것 같으니, 제목은 저래도 속 내용은 낭만적이지 않았을까? 제목처럼 남자 친구의 등짝을 있는 힘껏 발로 차 주고 싶을 만큼 꼴보기 싫은 일이, 갓 사귄 연인에게서는 있어서는 안 될테니 말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본 소설이 나에게는 늘 그렇듯(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도 눈만 껌벅인 나다.) 한 번 읽고 구석에 쳐박아 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려 6년 전에 읽었던, 내용도 기억 안 나는 소설의 제목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은, 바로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옛 소설을 떠올리며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이유는......?




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아버지께서는 술을 '안' 드시는 것이 아니라 '못' 드시기에 우리집에서 술을 보는 일은 일 년에 단 몇 번 뿐이었다. 그것도 맥주로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술에 취한 사람은 딱 질색이다. 아-- 술 취한 사람들의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무한반복형 주사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아버지께서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술을 즐기지 않으시기에 늘 퇴근하고 나서도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와 놀아주시거나 다른 일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 가끔 남편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술 취한 기색을 보이면 나는 별다른 응수를 하지 않은 채 남편을 얼른 재우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순간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잔소리는 전혀 하지 않지만 당신의 주정을 받아줄 의사는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절대 방전되지 않는 건전지를 끼운 것 같은) 아기를 돌보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줘야 할 이 시기에,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평소와 다른 말투와 행동을 보일 때면, 내 얼굴이 '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빠를 기다리는지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는 결코 잠을 안 자는 아기를 안고 밤 12시가 넘는 시각까지 동동거렸는데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은 아기 한 번 안아주지 않은(못한??) 채 잠에 들어 버렸다.

쿨쿨쿨, 이럴 때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을 보면???
...... .

put up some prints today...
put up some prints today... by decor8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계획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 있다. 거실과 주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남편에게 끊임없는 텔레파시를 보내느라 골치가 다 아플 지경인데도 꿈쩍 않고 앉은 채로 거실에 있는 남편, 내가 말 대신 효과 없는 텔레파시를 계속해서 보내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그 '어렵다'는 시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시어른들을 만나도 어쩔 수 없이 시댁은 시댁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만 끝내고 바로 출발해도 백만 년 만에 다시 가 보기로 한 청계천 나들이에 한참이나 늦을 텐데, 남편은 이런 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하하하 속 없이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저녁에 가면 더 좋다는 청계천에 오랫만에 놀러 좀 가 보나 했는데, 오락 방송을 보며 그 속의 일환이라도 된 양 희희낙락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눈치를 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이럴 때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자'고 해 주면 진정으로 고마우련만, 쿠션을 끌어 안고 텔레비전 앞에 바싹 붙어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남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계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결국 스스로 청계천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내일 또 출근해야 되는데 그냥 조금 더 여기서 쉬다가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낫지. 오히려 더 잘 됐다 생각하고 나도 재미있게 웃으며 오락 방송을 보는데, 눈 앞에 저녁 먹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등짝이 보인다.

정말, 발로 차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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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피곤했던 탓에 버스 안에서 잠시 기대에 쉬고 있었는데 건너편 옆자리에서 할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있는대로 툴툴거리셨는데, 그와는 별개로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방으로 가서 전화기 옆을 보라는 할머니의 심술궂은 대꾸를 들으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젊었을 때부터 몇 십년 동안 남편이 OO어디있어? OO는? 이라고 물어 봤을 것 아닌가?

남편의 출근 준비로 한창 바쁜 우리집의 아침, 남편이 갈 곳 잃은 새처럼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또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인데 잘 찾아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차마 못 물어 보고 계속해서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남편이다. 으이구--하는 소리가 목까지 차는 순간이었지만 모르는척 눈을 돌리다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수건 아래에 빨간색 휴대전화 끄트머리가 보인다.

이거?
남편의 눈 앞에 휴대전화를 대령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이어지는 남편의 보물찾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는 대개 아침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부처님 손바닥 처럼 나는 남편이 다음에 찾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알면서도 척척 대령해 주지 않는 것이 남편은 서운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스스로' 단번에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는 연습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잘 해 두는 편은 아니지만 양말, 속옷, 아기 기저귀, 손수건 등등은 늘 같은 서랍장 안에다 넣어 둔다. 이를 테면 양말은 작은 서랍장의 가운데 칸에, 아기 손수건은 아기 서랍장의 세 번째 칸에 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침마다 '여보, 양말 어디있지?'를 하염없이 외쳐댔다. 남편은 늘 느즈막히 출근 준비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2~3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기 때문에 늦도록 잠을 못자고 시달렸던 탓에, 나는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해도 눈을 반쯤 감고 비몽사몽 아침상만 겨우 차려 주었었는데, 그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 '여보, 양말 어디있지?'는 결국 나의 버럭질을 유발했다.

결혼한지 햇수로 3년 째. 그동안 버럭 버럭 몇 번을 했더니 남편은 무언가를 찾아야 될 때 나에게 어디 있는지를 묻는 대신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 보거나 냉장고와 냉동실을 번갈아 가며 몇 번씩 열어서 원하는 것을 찾곤 한다. 미안하게...... .

paper heart
paper heart by tuli nishimur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대신 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할 땐 조금 더 친절해 지는데,
여보, 아기 서랍장 맨 윗 칸 오른 쪽에 보면 가위 손톱깎이가 있어. 그거 좀 가져다 주세요.
여보, 냉장고 문 열면 문쪽에 양념통 가득 들어 있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케찹 좀 꺼내 올래요?
...... .

문득 뜨끔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고 업무 시간에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도,
집에 있다가 갑자기 컴퓨터가 말썽이라고 징징대며 전화를 했을 때도,
생수통에 물이 떨어졌다고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을 때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그 쉬운 버럭질도 없이) 차근차근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었다.

남자와 여자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들이 기록된 갖가지 심리서적들을 섭렵했음에도 이렇게 이해심이 부족하다니!(뜬금없는 반성의 시간이다.) 버스 안에서 나를 씽긋 웃게 만들었던 휴대전화 속 할아버지처럼 남편이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물어 올 지라도 나는 너그러히 대응해 주어야겠다. 물론 나도 어찌할 바 없는 버럭질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등장할 지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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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매일 전화로 수다떨고, 메신저로 대화하며, 틈틈히 만나 같이 노는 여고동창생이 '있었다'.

우린 자신의 속마음을 서로에게 낱낱이 다 드러내었으며 나는 재밌는 영화가 개봉하거나 맛있는 음식점을 새로 발견했을 땐 꼭 그 친구와 함께 갔다. 물론 그 친구도 싸고 예쁜 옷이 많은 가게와 커피향이 좋은 카페를 꼭 내게 소개해 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둘 다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당연한 듯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 몇 달은 좋았다. 팔짱을 끼고 장에 가서 사 온 반찬거리로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도 좋았고 휴일이면 만화책을 빌려 와 밤새 뒹굴거리며 킬킬대는 것도 재밌었다. 처음 몇 달,
우리의 본성이 눈뜨기 전까지는...... .

시간이 흘러 같이 산 지 5, 6개월쯤 되었을까? 나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친구의 양말이며 옷가지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밥이며 설거지가 내 차지가 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기 일쑤였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쉽게 났고 그런 내 마음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렇게도 자주 드나들던 극장이며 쇼핑몰에 자연스레 발길이 끊어지고,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던 수다가 점점 지루하고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방문을 걸어닫은 채 다른 이들과 통화하고 약속을 잡았으며 서로에게는 침묵하고 서서히 무관심해졌다.

폭풍전야 같던 시간들이 흐르고 마침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그 일 때문에 친구와 나는 서로를 집어삼킬 듯 싸웠고 또 울었다. 그것은 차라리 속 시원한 순간이었다.

각자 다른 집을 얻어서 이사를 가고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궁금함은 모가 난 돌처럼 내 심장 한 구석을 찌른다. 내 모든 것을 다 나누어도 아깝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어쩌다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왜그렇게 난 이기적이었던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을 정하지 못한 채 서로의 영역을 너무 많이 침범했던 것 같다. 미묘하고 섬세한 우리 여자들에게는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보호받고 싶은 자신만의 영역이 있게 마련인데...... .

어느날 불쑥 그녀 앞에 나타나 서로 마주보며 맘껏 웃어보고 싶다. 그녀가 나를 보고 다시 웃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욕심은 아니리라. 얼른 그녀를 만나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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