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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꼴꼴꼴꼴꼴, 오랫만에 분위기 잡을 일이 있어서 포도주를 따서 우아하게 생긴 잔에다 따르는데, 잠깐!! 신랑이 황급히 손으로 포도주병을 잡아 챈다.

왱?

포도주를 따를 땐 이렇게 해야지.
남편은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던 참 버거워 보이던 그 자세로 포도주를 따르기 시작한다. 병 꽁무니를 엄지 손가락으로만 받히고 나머지 손가락으론 병 몸체를 잡은 그 자세. 그리고 병을 돌리면서 마무리.
자고로 포도주는 이렇게 따라야 되는거야?

왱? 왜 포도주만?

오렌지주스도 입구가 둥글고, 막걸리도 입구가 둥글고 음료를 담은 모든 병은 다 그렇게 생겼는데 왜 포도주만 그렇게 따라야 돼?
나도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들을 많이 봐 왔기에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이야기의 귀재로 알려진 '로알드 달'의 소설 <맛>에는 포도주 이름 맞추기를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포도주 전문가들은 킁킁킁 코로 먼저 향을 느끼고 조금 입에 머금은 후 입을 벌려 흡흡 공기를 들어 마시면서 공기와 포도주가 잘 섞이게 하여 맛을 극대화한다는 뭐 그런 장면이 나온다.(너무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

이야기꾼 답게 그 책에 나온 묘사가 참 구체적이면서 사람을 쏙 빠져들게 해서 나는 도저히 따라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물 한 컵을 따라 놓고는(당시 포도주를 구할 재간이 없었다.) 마치 사용 설명서를 읽는 듯 찬찬히 포도주 맛을 음미하는 부분만 다시 읽은 후 책 속 인물이 하는 것 처럼 해 봤다.

혀를 굴리면서 공기를 흡흡...... . 물만 질질질이었다.

Glitter / Brillo
Glitter / Brillo by victor_nuno 저작자 표시비영리


얼마 전에 다이어트에 대한 모든 자료를 뒤지다가 뒤늦게 <프랑스 여인처럼 먹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프랑스의 음식 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만큼 그 속에 포도주도 빠질 수 없었고, 그 속에서 '글'로만 배웠던 포도주 마시는 법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책 속에 써 있던 것과 똑같았다. 코로 먼저 킁킁킁. 입으로 흡흡.

그런데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내가 참 무식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설명하면서 포도주 맛있게 마시는 법을 설명해 주는 그 장면이 참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그 분은 전문가라서 나 처럼 질질질 흘리지는 않았지만 포도주하면 딱 떠오르는 고상한 느낌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만약 첫 데이트를 할 때 평소 포도주를 즐긴다는 걸 알리고자 그 전문가처럼 했다간 딱지맞기 쉽상일 것 같았다. 포도주에 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려고 할 때 포도주를 곁들이는데 과장된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포도주를 마신다면 분위기가 완전 꽝이기 때문이다.(포도주를 잘 모른다는 전제가 있다.)

당연히 무식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왜 꼭 포도주를 마실 때는 그렇게 요란을 떨어야 될까? 나는 그냥 우아하게 소주를, 멋스럽게 맥주를, 달달하게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더 좋다. 당연히 모유 수유가 끝난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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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만 주야장천 먹던 내가, 감히(?) 신들만 마신다는 신의 물방울 포도주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도주에 대한 지식을 넓혀보겠다는 포부는 절대없고 포도주 고수들이 좋아한다는 시큼하거나 떫은 맛의 포도주 보다는 달달한 맛을 특히 선호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포도주은 그저 비싼 술의 일종이며 미지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오늘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를 만났다. 학교 다닐 땐 꽤 친했지만 졸업하고나서는 별 소통이 없었던 사이인지라 둘다 아주 반가운 마음을 우물쭈물 표현하다가
요상하게도 화제가 '포도주'로 넘어가게 되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우리는 포도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으러 어느 레스토랑에를 들어가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러나 곧이어 여자 둘이 마시기엔 포도주보다 더 멋진 술도 없을 것 같다는 폼생폼사 정신이 발동하고나니, 오랫만에 만난 후배에게 비싼 밥 한 번 못 사주랴하는 맘이 들기도 했다.


맛있고 고급스러운 저녁 식사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와 기분 좋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언니는 못 보던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요~'하는 후배의 문자가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내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던 것도 같다. 장소와 음식이 사람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 듯. 좀 간지럽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변화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달콤한 기분을 즐기는 동안 내 지갑이 이렇게나 가벼워졌으니 아마도 당분간은 '인간의 물방울'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인 '맥주의 기간'이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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