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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설거지도 하고 밑반찬도 조금 만들어 볼 요랑으로 시작한 부엌일, 라디오 속에서 흘러 나오는 흥겨운 음악을 들으니 일도 놀이처럼 즐겁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왠일인지 송은이와 신봉선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듣고 있었던 라디오 방송은 송은이와 신봉선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동고동락'이었다. 그녀들은 이윽고 끈적한 목소리로 정체 모를 발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모실 게스트는 그레이드가 하이 하기 때문에 그냥 소개를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초대 손님을 모시는 자리라서 그런 아부성 소개를 한 것이었다.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무수히 많은 영어 단어가 나열된 다음에야 '그레이드가 하이'한 손님이 인사를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손님이기에 '비루한(?)' 우리말로는 소개할 재간이 없어서 영어도 아니고 우리말로 아닌 말을 섞어가며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가.



부엌일을 마치고 텔레비전을 켜서 채널을 돌리던 중, 코메디 보다 더한 웃음을 주는 방송이 있어서 잠시 그 방송을 보게 됐다. 이제는 그러려니 할 때도 됐지만 볼 때마다 그냥 넘어가기가 힘이 든다. 화면 속에는 여름 옷들을 아주 싼 값에 묶음으로 팔고 있는 쇼핑호스트가 있다. '심플한 블랙이지만 디테일이 럭셔리하기 때문에~~ 옐로와 그린이 믹스돼 있는 이 블라우스는 웨이스트에 라인이 들어가 있어서~'. 모든 쇼핑호스트들은 영어 단어를 섞어쓰기를 너무 좋아한다. 홈쇼핑 연출진들이 원하는 것인지 그들을 교육시키는 학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은 한국어 발음도 어딘지 모르게 영어와 닮아 있다.

이번주 '놀러와'에서는 출연진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이 경험한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여기에서 이하늘은 아주 망신을 당하고 말았는데, 초반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욕심으로 썼던 '픽션'이라는 단어가 틀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경험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만 '픽션'과 '논픽션'이 헷갈려서 무서운 얘기가 우스운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냥 우리말로 했으면 됐을 걸, 그는 왜 굳이 영어를 써야만 했을까.


또 며칠 전에는 임신 중인 사촌 언니와 병원에서 열린 산모대학에 참석하게 됐는데, 거기서 기가 막힌 강의를 듣고 말았다. 강의의 제목은 '영어 뇌를 만들어 주는 기적의 음악 태교' 이 제목을 보고 당장 강의를 듣고 싶으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별거 없었는데, 음악을 담당하는 뇌와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같으니 태교로 음악 들려주기를 많이 하면 아기가 나중에 영어 등의 언어를 잘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뇌까지 영어 뇌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며 한참을 씁쓸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질문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나와는 달리 많은 산모들은 태아 때부터 영어 교육을 시키고, 영어 뇌까지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진심으로 슬펐다.


주말 드라마 '스타일'이 인기를 얻으면서 같이 인기를 얻게 된 '엣지'라는 유행어.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지 못해 안달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상황에 '엣지'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데, 이런 현실 속에서 앞으로 '노숙자'라는 말을 쓰지 말고 '홈리스'라는 말을 쓰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노숙자'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과 부정적인 의미를 없애기 위함이라는데 영어로 얘기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이 없는 웃음을, 어이 없어 눈물을 짓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엣지' 없는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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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요즘 처럼 보고 싶은 방송이 많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드라마도 그렇고 예능도 그렇다. 특히나 나는 예능 방송을 좋아하는데, 이런 나에게 영양가 없는 쓸데없는 것을 뭐 그리 챙겨보냐고 구박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예능을 보며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나면 몸도 마음도 훨씬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니, 나에게 예능은 비타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각 방송사에서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마구마구 쏟아내니 골라보는 재미가 더해져서 정말 좋다.

그런데 볼 만한 방송이 많아졌다는 것이 그것을 선택하는 내 입장에서는 즐거운 고민이지만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가 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좋은 방송이 많아질 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질 테고 시청률 경쟁이 치열할 수록 제작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더 커 질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는 한 가지 특이한 유행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방송을 보는 도중 프로그램의 줄거리(?)를 계속해서 내 보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방송이 시작할 때 시청자들에게 전체 줄거리를 읊어주듯 재미있는 부분부분을 맛보기로 보여 준다. 마치 '우리 프로그램에는 이런 이런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으니 다른 거 보지 마시고 꼭 채널 고정하세요'하는 듯 하다. 앞뒤 다 잘라내고 특정부분만을 쭉 나열해서 보여주니 시청자들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뭐 이런 것은 예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니 특이할 것도 없다. 그런데 방송을 한참 보는데 갑자기 화면 위에 '잠시후(혹은 next)'라는 자막이 붙으면서 또 다시 방송의 주요 부분을 한 차례 보여준다. '아직 채널 돌리시면 안 되요, 뒤에 재미있는 것이 이만큼 더 남았거든요.'하듯 말이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작자는 전체줄거리, 그 다음 1/3의 줄거리, 마지막 줄거리 총 세 번을 반복한 다음에야 안심하는 듯 하다. 어떤 땐 방송의 내용이 아주 좋아서, 전혀 채널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받지 못했을 만큼 재미있었는데도, PD 님은 혹시나 그 사이를 못 참고 채널을 돌려 버릴까봐 전전긍긍 하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까지 시청자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노력했을까. 어느 한 프로그램만의 상황이 아니다. 요즘에는 방송을 보다가 갑자기 줄거리가 나와서 다음회의 예고인가? 왜 이렇게 빨리 끝나지?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여지없이 그 날 방송분을 또 다시 줄거리 보여 예고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 뿐인가? 한 회 분의 방송이 끝나면 다음 회의 예고가 또 나온다. 시식 코너에서 미리 맛을 보여주듯 프로그램의 주요 부분을 한 차례 쑥 훑어주며, 끝까지 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또 우리 방송을 봐 주실거죠? 하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는 정작 다음 주 방송에는 편집된 부분을 보여 준다거나 그 다음주 방송분까지 미리 보여줘서 시청자들에게 실망을 주는 상황도 생긴다. 예고편이 실제 방송분과 많이 다른 경우에는 뿔난 시청자들이 항의를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예능계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계속 되는 예고들을 보면서 차라리 이 시간에 재미있는 부분 하나를 더 보여주는 것이 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시청자의 마음이 떠날까봐 두려워서 조금만 기다리면 더 재미있는 것이 나온다고 유혹하는 것보다 리모컨에 손이 안 가게끔 재밌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가장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경쟁이 치열한 이런 때일수록 다른 프로그램을 너무 의식하기 보다는 자기 방송만의 특성을 잘 살리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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