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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네 번째(벌써!!!)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리솜 포레스트로 여행을 떠났어요. 벌써 결혼한지도 꽤 오래 되었네요. 부부로 사는 동안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항상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첫 번째, 두 번째 결혼 기념일은 대학 강사로 일하던 중국에서, 세 번째 결혼 기념일은 다솔이를 낳느라 병원에서 보냈기에 제대로 분위기를 잡을 기회가 없었는데요, 그래서 이번 결혼 기념일에는 둘이서 조금 더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답니다.


낮동안 다솔 군과 신나게 놀아 주어서 다솔이는 일찍 잠들었고요, 저희가 머물렀던 리솜 포레스트 28평형에는 방이 두 개 있어서 잠든 다솔이는 옆방에 콜콜콜 재워 두었어요. 저희는 부부만의 특별한 시간을 조금 갖고 리솜 포레스트의 밤 풍경을 즐기기로 가지기로 했지요.


저희 부부가 같이 의논해서 계획한 결혼 기념일 이벤트는 '결혼식 사진을 다시 보는 것'과 '나, 남편(아내), 그리고 아이들에게 엽서를 써서 1년 뒤에 받아 보는 것'이었어요.




리솜 포레스트에는 느림 우체통이 있어서 방에 준비 돼 있는 엽서에 사연과 주소를 적으면, 봉투에 넣어 1년 뒤에 배달해 주는 특별한 배달 서비스가 있거든요.




저와 남편은 각자 1년 후의 자신에게 보내는 '미래 일기'를 쓰고,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고, 또 다솔이와 곧 있으면 태어날 작은아이에게도 편지를 썼어요. 1년 뒤에 받아 보면 정말 뭉클할 것 같아요.


엽서를 다 쓴 후에는 비장의 무기 니콘 쿨픽스 S1200pj를 활용해서 더욱 근사한 시간을 가졌답니다.




 니콘 쿨픽스 S1200pj에는 프로젝터 기능이 있잖아요? 실내 조명이 밝아도 무리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마음껏 볼 수가 있는데요, 벽, 바닥, 천장 어디든 스크린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정말 놀랍죠?


 

위치를 지정한 후에 완벽하게 세팅을 하고,




짜잔~~ 드디어 남편과 함께 미리 준비해 간 결혼식 사진을 한 장, 한 장 봤답니다. 2007년 9월의 저는 참 예뻤네요. 흑~ 어렸고요, 흑흑~ 날씬했던 것도 같아요......


그래도 결혼을 잘 해서 어디서든 자랑하고픈 듬직한 남편을 얻었고, 남편과 전부와 저의 일부를 닮은 귀한 다솔이도 낳았고, 조금 있음 제 모습을 더 많이 닮았을 거라도 확신하는 어여쁜(??!!) 딸아이도 낳게 될테니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좋은 건 사실이지요!




자세를 바꿔 누워서도 보고(쿨픽스 1200pj를 아이폰, 아이패드와 연결하면 정말 다양한 것들을 프로젝트 기능을 활용해서 볼 수 있어요. 그것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 번 글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남편에게 결혼식때 참 재미있었다며, 또 한 번 웨딩 드레스를 입고 리마인드 웨딩을 하자고 졸랐답니다. 요즘 많이들 하잖아요. 둘째 출산 후에 완벽하게 다이어트를 해서 결혼 5주년에는 웨딩 드레스를 다시 입어 봐야겠어요. 한껏 로맨틱해진 기분으로 저희 부부는 밤 거리를 산책하러 나섰어요.




리솜 포레스트의 밤 풍경이에요. 곳곳에 조명이 켜져 있어서 밤이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마저 드는데요,




바위 틈 곳곳에 버섯 모양의 예쁜 전등이 숨겨져 있는 덕분이랍니다. 전등이 따뜻한 불빛을 만들어 주어서 나무들이, 돌이, 별빛이 저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을 함께 축하해 주는 듯 느껴졌는데요,




밤 하늘이 정말 예쁘죠?




저희 집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 해요.
다솔이가 좋아하는 '반짝 반짝 작은 별' 노랫속 별들이 바로 저 하늘에 있노라며, 잠든 다솔이를 깨우고 싶을 만큼 둘이서만 보기엔 아까운 밤 하늘이었어요.




저희가 묵었던 방도 밤에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들지요? 저는 부엌에 있었던 고급스러운 와인잔을 그냥 두기가 아쉬워서, 박하차를 진하게 우려 내 와인잔에 담아 분위기를 내 보았답니다.

 



임신 34주라 져지 원피스를 입으니, 꼭 배에 뭘 넣은 것 처럼 보이네요. 우리 둘째 '달이'도 리솜 포레스트의 밤풍경을 함께 즐긴 셈이에요.


 



엇! 보이시나요? 제 뒤에서 후광이!!
히힛, 조명을 이용해서 근사한 사진을 연출해 보기도 했고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저희 부부는 늦은 시각이라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연출 사진을 맘껏 찍어 보았어요. 배가 불룩나온 임신부의 모습으로, 민낯에,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는 우스운 몰골을 하고서 한껏 폼을 잡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카메라 기능과 빛을 이용해서 하나의 사진 속에 다양한 포즈를 담아 보기도 했어요. 결혼 기념일 여행인데 뭘 한들 즐겁지 않겠어요?


다시 방으로 돌아가 다운 받아 온 영화까지 한 편 본 후에야 잠에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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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사랑 없이는 같이 못 먹는다는 양푼이 비빔밥을 넉넉하게 비볐다. 송송 썰어 살짝 무친 배추 겉절이도 넣고, 신선한 상추도 아낌 없이 팍팍 넣고, 두부가 듬뿍 들어간 구수한 멸치 된장찌개에 알맞게 매운 고추장까지 인심 좋게 넣어서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숟갈까지 넣으니 와! 기가 막히다. 남편이랑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아구아구 냠냠냠 볼이 터지도록 먹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1박 2일이 한창 방송되고 있었다.

마침 1박 2일 속 그녀들도 오물오물 맛있게 무언가를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는 순간 볼이 미어지도록 밀어 넣은 내 밥숟가락이 심히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남편은 열중해서 먹고, 집중해서 보느라 내 볼에 부끄러워 소름이 돋은 줄을, 부지런히 음식을 퍼 나르던 내 숟가락질이 점점 느려졌음을, 모르는 듯 했으나 나는 더 이상 아구아구 비빔밥을 퍼 먹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여배우라고 해도 서른 일곱 살의 최지우가, 서른 넷의 김하늘이 그리도 다소곳이 앉아 저리도 얌전히 음식을 먹는데, 아무리 아줌마라고 해도 서른 셋의 나는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들을 보면 아줌마 경력이 늘어갈 수록 점점 더 화통대담해지고 점점 더 내숭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보이던데, 어쩌면 여자들에게 내숭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말이다.

사실 나라고 처음부터 양푼에 밥을 비벼 하마 처럼 입을 쩍쩍 벌리며 먹었겠는가? 나도 한 때(??)는 음식점의 음식들을 남길 줄도 알았으며, 입가에 양념이 묻을까 조심조심 신경 써 가며 밥을 먹기도 했었다. 뜨거운 국을 그릇째 후후 불어 마시지도 않았었고, 스파게티나 라면 같은 면 요리는 포크로 돌돌 말아 입을 '아~'가 아닌 '오~' 정도로 벌려 오물오물 먹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말이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갔을 때 남편에게 무언가 말 실수를 하여 급히 남편을 달래줘야 했을 때가 있었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남편에게 팔짱을 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콧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남편은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며 앞으로도 이렇게 팔짱을 끼고 다니자며 한동안 싱글벙글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생긴 후 아이를 안고, 업고, 쓰다듬어 주느라 남편에게는 제대로 된 애정표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끊임 없이 노력하며 지켜 가는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받지 않도록 신경써서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 더 표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워 보이도록 노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리라 다시금 결심하는 것, 이미 결혼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전혀 다른 사람이 돼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남편과 연애를 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올백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출신을 알 수 없는 축축 늘어진 옷들을 입고 아구아구 밥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워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도 절대로 머리를 바짝 묶지는 않았던(큰 얼굴이 드러날까봐), 연애시절 남편을 만날 때는 가장 예쁜 옷들로만 입고 있었던, 자장면도 아름답게 먹었던 과거의 내 모습을 꼭 다시 되찾겠노라고 결심에 결심을 했다.

남편을 위해, 나를 위해, 우리의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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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장장 세 시간, 꽃샘추위에 날은 춥고 아이들은 슬슬 졸음이 오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대로 길 위에 서서 세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고, 일행 중 우리 집이 가장 가까웠고... 모두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마친 후 점심을 먹고 노닥거리며 오후에 있을 특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 식당에서 수다를 좀 떨다 보면 특강 시간까지 무난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문제는 추위와 아이들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예원이네와 밀린 이야기를 좀 하고 운동장에서 잠시 놀다 보면 얼추 시간이 맞을 줄 알았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보다 날씨는 더 추웠고 시간은 더 천천히 갔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잠시나마 눕혀 재울 곳, 우리 어른들도 조금 더 편히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고 가장 쉬운 방법은 교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쉬는 것이었지만, 결단을 내리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집은 쓰레기통이 '형님' 할 만큼 너무너무 심하게 말 할 수 없이 지저분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있는 집이 다 그렇죠' 하며 서글서글하게 웃는 예원 엄마가 차마 예측하지 못할 더러움이 우리집 그 자체였다. 예원 엄마는 특히나 부지런한 살림꾼이니 때문에 예원이네는 언제나 먼지 하나 없는 말끔함을 자랑한다. 가끔은 자신의 그런 기질이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며 토로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발 디딜 곳 없는 꼴을 만드는 나 보다야 백만 배는 나은 습관이다.

함께 우리집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더럽다, 정말 더럽다, 상상을 초월하게 더러울 것이다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이해해 줄 것을 하소연 했고, 현관문이 열리자 마자 후다닥 들어가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만 대충 치웠다.




화끈...... .
얼굴이 달아 오르고, 나는 그 날의 후유증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얼굴을 감싸게 되었다.

소파 밑에 들어가 있는 벗어 놓은 양말, 여기 저기 굴러 다니는 아이이의 블록들, 싱크대 위에 겹겹이 마치 유물처럼 쌓여 있는 그릇과 접시들, 그리고 차마 눈 뜨고 못 볼, 말라 붙어 있는 바닥의 김치 국물이며 과자 부스러기.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진지했는데, 나 홀로 좀비처럼 엇박자를 탔다. 치부를 들켜 버린 까닭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저찌 그 날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갑작스럽게 손님을 초대하게 된다면 적어도 세 시간 전에는 나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현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절대로 열어 주지 않을 거라는 엄포도 놓았다.

손님이 오시기 세 시간 전,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할 것인데 밀려 있는 설거지와 빨래도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못 해도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얼른 샤워를 하고 한 듯 안 한듯 투명 메이크업을 하는 데 삼십 분, 남편의 손님을 떡진 머리와 눈곱 낀 얼굴로 맞이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내 놓을 간단한 음식 준비에 또 삼십 분. 실제로 써 보면 세 시간이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손님과 함께 갑자기 집으로 오면서 주차장에서 전화하는 남편은 빵점, 그나마의 귀띔도 없이 초인종부터 누르는 남편은 마이너스 이백점. 집안 꼴을 저렇게 지저분하게 해 놓는 나는 낙제다. 앞으로는 아이가 자는 시간에 꼭 깨끗하게 청소를 해 두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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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나를 폭발하는 남편의 대화법'이라는 글을 썼다가 '웃기네, 너나 잘 하세요'류의 덧글 폭탄을 맞았다. 행여나 나를 옹호해 주는 (큰절을 올리고 싶도록 고마운) 분들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소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 했던 고마운 분들의 덧글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삼일 동안 컴퓨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을 덮어 쓰고 반성에 또 반성을 했다.

무엇을???
나는 왜 이렇게도 글을 쓰지 못하는 가! 하는 것을...... .
가볍게 한 번 웃자는 의미로 쓴 글에,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시죠?'라는, '4주 후에 뵙겠습니다'가 언뜻 떠오르는 덧글까지 달린 것을 보면 올바른 대화를 못 하는 것은 남편 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네네, 당연히 저는 남편을 98% 사랑하고요, 다만 2% 부족한 남편의 대화 '기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제목에도 썼었잖아요,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대화법'이라고요.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글 아래에도 어쩌면 나를 울상짓게 만드는 덧글들이 가득 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곳은 내 블로그고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권한이 있으니까......
그런데 뭐지? 은근히 소심해지는 이 상황과 어쩐지 비겁해 보이는 이 변명들은?(참고로 내 혈액형은 A형이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자들은 역시 화성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홀로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여심을 감동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남편들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아내의 마음에 기름을 부어 결국 폭발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꾸만 '원인''해결책'을 제시해 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상황 1> 원인을 찾는 대신 공감과 이해를

자고 일어났는데 한겨울에 모기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한 두방 물린 것이 아니라 허리에 네 개, 다리에 세 개 물린 자국이 있어서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래도 간지러워서 벅벅 긁다가 나는 남편에게 모기에 물린 자국, 내가 벅벅 긁어서 더욱 벌겋게 부어 오른 자국을 보여 주며 '나 모기 물렸어"라고 말했는데, 남편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당신 어제 입었던 옷이 뭐지?' ----'몰라' 
'요가 갔을 때 입었던 요가복 그 옷 속에 모기가 살고 있나? ---- '어??'
'이불 언제 빨았어?'----'뭣이라???'

결국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모기에 물러 잔뜩 부어 오른 모습을 보여 준 까닭은 당장에 모기를 잡아서 죽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간지러움에 시달리니까 나를 좀 위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식구 중 나 혼자서 모기에 물렸으니까 그 윈인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했고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럴 땐, '많이 간지러웠겠다'. 딱 한마디면 되었을 것을...... .


<상황 2> 말 대신 행동으로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하면서 청소, 빨래, 음식 장만까지 혼자서 다 해야했던 내가 남편의 퇴근 하자마자 쪼르르 달려가서 어깨를 있는 대로 늘어 뜨리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집으로 좀 오셔서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그럼 당신이 회사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맞불을 놓아 나를 기막히게 만든다.

나도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전업 주부이므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잘 해나가는 것도 프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도 가끔은 불평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 유독 그 날따라 혼자서 전전긍긍 힘들었기 때문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게다.

이럴 땐 '힘들었지? 내가 많이 도와줄게'라든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아내는 맘이 녹아내렸다. 걸래질을 진짜 시킬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맘에 없는 말을 하기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면 차라리 없이 꼭 껴안아 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면 아내는 금세 생기를 찾게 될 것이니 말이다.



<상황 3> 맞장구, 혹은 말꼬리 따라하기

남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걸그룹을 보느라 헤벌쭉해진 남편을 보며 나는 인터넷에서 본 과거 사진과 함께 과거에 그 소녀가 사실은 좀 놀았던 언니 중 하나였다더라, 요즘에는 꼭 성형 수술이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주사로 시술만 받으면 이미지가 확 달라져서 예뻐진다더라, 나도 의학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누구 못지 않게 예뻐질 수 있을텐데...... 등등 내가 생각해도 쓸 데 없는 소리를 늘어 놓을 때

남편은 어디서 그런 소리를, 네가 봤냐며 정색하고 따져서 아내를 무안하게 만들기 보다는 아내가 하는 말에 '그래, 그래, 그렇다며?, 응, 그렇지, 얼씨구, 오호라!' 맞장구를 쳐서 아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여자란 때로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일도 좋아하고 자기가 연예인이랑 비교하는 자체가 이미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래도 한 번 무리수를 던져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맞장구를 치거나, 아내가 하는 말의 마지막 부분을 따라하며 반복하면(누구누구가 어릴 때 그렇게 놀았다던데? 하면 아,,,좀 놀았었구나. 나도 조금만 손 보면 엄청 예뻐질 수 있을텐데, 하면 그럼 엄청 예뻐질 수 있지. 하며 말꼬리를 따라하는 대화기술) 남편이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나를 엄청 대우해 준다며 감동받을 것이다.

아참!
내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나는 그저 이따금씩 여자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해서 내 속을 긁는 남편의 대화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짝, 찰떡궁합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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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해가 중천에 떠서 나를 빼꼼히 (햇님에게 진짜로 눈이 있다면 아마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 볼 때까지 쿨쿨쿨 자다가, 띠리링~ 울리는 문자 메시지 소리를 듣고서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애써 시계를 외면하고서 약간의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 잘 자고 일어났더니 피부가 좋아졌다는둥 역시 잠이 보약이라는둥 애교아닌 애교를 부릴 수 있었던 까닭은,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는 까닭이었다.어제 저녁에 양파와 마늘을 달달달 향기롭게 볶고 감자, 고구마에 닭고기까지 듬뿍 넣어 만들어 맛나게 먹었던 카레라이스가 아직도 한솥 가득 남아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대접에 밥을 넉넉하게 푸고 그 위로 카레를 보 기좋게 담으면 따로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로 훌륭한 아침 식사가 된다. 뜨끈하게 카레를 데우고 적당하게 잘 익은 배추김치 한 접시만 곁들이면 되니 식사 준비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잠기운을 눈가에 붙인 채 카레솥에 불을 올린 후 '식사하세요' 남편을 부른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돌아와 김치 접시를 식탁에 내려 놓는데, 끙끙끙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냄비 뚜껑을 열자 이미 하얗게 곰팡이 비스무리한 것이 노란 카레와 뒤엉켜 있다.
어제 저녁 딱 한 끼 먹은 카레가, 이 추운 겨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끓여 두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왜왜왜 벌써 상해 버렸는지 속상해 하고 있는데 남편이 식사를 하러 왔다. 어쩌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남편에게 카레가 쉰 것 같다고 어제 '팔팔'은 아니지만 '슬쩍'은 다시 끓여 두었는데도 쉬어 버렸다고, 그래서 아침은 '라면(그나마 소시지와 만두를 넣은)'을 먹어야 되겠다는 끔직한 소식을 전했다. 남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다른 냄비에다 물을 받아 가스불에 올리는데, 의기양양한 남편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렸다.

'나는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카레가 왜 쉬었는지 알아. 당신이 카레를 팔팔 끓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미생물은 100도 이상에서는 죽지만, 당신은 적당히 끓여서 오히려 미생물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 주었기 때문에 카레를 상하게 만들었어'



사실 남편에게는 말 하지 않았지만 어제 먹다가 남긴 카레를 그대로 카레솥에다 부었기 때문에 침이 들어가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말이 백번 옳다. 그러나 꼭 그렇게 따져야 했는지...... 하긴 되짚어 보니 남편은 위로를 구하는 내 말에 늘 이런식이었다.

몇 년 전
결혼하고 처음 맞는 '초복'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삼계탕을 끓였다. 그것도 시부모님까지 초대한 자리였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결혼초라) 어려운 시부모님 앞에서 혹여 실수라도 할까봐 끙끙대면서 닭 네 마리를 기적적으로 끓여 내 식사 대접을 했다.

맛있게 드세요.

닭다리가 잘 뜯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실패를 예감하면서, '복화술'로 슬쩍 남편에게 귓속말을 했다. 삼계탕이 좀 이상하지?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우렁찬 남편의 목소리,

응. 닭을 좀 더 끓여야 했어. 덜 익어서 닭다리에서 냄새나.

그 때 내가 웃었던가? 웃었대도 웃는게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나를 화나게 만드는 남편의 대화법은 수두룩 빽빽이다. 

아무리 화성에서 온 남자들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화법을 고수하는 족속들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닌 듯 싶다. '이해' 받길 원하고 '공감'해 주길 바라는 여자들의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도 몰라 주는지......

이 글을 쓰다가 나는 글을 한 번 날렸다. 다행히 자동저장 기능이 있어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시 불러올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복구시킨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왜 갑자기 내 글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는 내 이야기에 남편은 대답한다. 대답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는데도 굳이 대답을 한다.

당신이 뭔가를 잘못 건드렸겠지!

내 저 인간을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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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는 책,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은 연애 시절에 샀던 소설이다. 사귄지 얼마되지 않아서 샀던 것 같으니, 제목은 저래도 속 내용은 낭만적이지 않았을까? 제목처럼 남자 친구의 등짝을 있는 힘껏 발로 차 주고 싶을 만큼 꼴보기 싫은 일이, 갓 사귄 연인에게서는 있어서는 안 될테니 말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본 소설이 나에게는 늘 그렇듯(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도 눈만 껌벅인 나다.) 한 번 읽고 구석에 쳐박아 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려 6년 전에 읽었던, 내용도 기억 안 나는 소설의 제목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은, 바로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옛 소설을 떠올리며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이유는......?




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아버지께서는 술을 '안' 드시는 것이 아니라 '못' 드시기에 우리집에서 술을 보는 일은 일 년에 단 몇 번 뿐이었다. 그것도 맥주로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술에 취한 사람은 딱 질색이다. 아-- 술 취한 사람들의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무한반복형 주사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아버지께서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술을 즐기지 않으시기에 늘 퇴근하고 나서도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와 놀아주시거나 다른 일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 가끔 남편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술 취한 기색을 보이면 나는 별다른 응수를 하지 않은 채 남편을 얼른 재우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순간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잔소리는 전혀 하지 않지만 당신의 주정을 받아줄 의사는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절대 방전되지 않는 건전지를 끼운 것 같은) 아기를 돌보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줘야 할 이 시기에,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평소와 다른 말투와 행동을 보일 때면, 내 얼굴이 '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빠를 기다리는지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는 결코 잠을 안 자는 아기를 안고 밤 12시가 넘는 시각까지 동동거렸는데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은 아기 한 번 안아주지 않은(못한??) 채 잠에 들어 버렸다.

쿨쿨쿨, 이럴 때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을 보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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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t up some prints today... by decor8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계획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 있다. 거실과 주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남편에게 끊임없는 텔레파시를 보내느라 골치가 다 아플 지경인데도 꿈쩍 않고 앉은 채로 거실에 있는 남편, 내가 말 대신 효과 없는 텔레파시를 계속해서 보내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그 '어렵다'는 시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시어른들을 만나도 어쩔 수 없이 시댁은 시댁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만 끝내고 바로 출발해도 백만 년 만에 다시 가 보기로 한 청계천 나들이에 한참이나 늦을 텐데, 남편은 이런 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하하하 속 없이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저녁에 가면 더 좋다는 청계천에 오랫만에 놀러 좀 가 보나 했는데, 오락 방송을 보며 그 속의 일환이라도 된 양 희희낙락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눈치를 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이럴 때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자'고 해 주면 진정으로 고마우련만, 쿠션을 끌어 안고 텔레비전 앞에 바싹 붙어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남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계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결국 스스로 청계천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내일 또 출근해야 되는데 그냥 조금 더 여기서 쉬다가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낫지. 오히려 더 잘 됐다 생각하고 나도 재미있게 웃으며 오락 방송을 보는데, 눈 앞에 저녁 먹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등짝이 보인다.

정말, 발로 차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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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피곤했던 탓에 버스 안에서 잠시 기대에 쉬고 있었는데 건너편 옆자리에서 할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있는대로 툴툴거리셨는데, 그와는 별개로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방으로 가서 전화기 옆을 보라는 할머니의 심술궂은 대꾸를 들으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젊었을 때부터 몇 십년 동안 남편이 OO어디있어? OO는? 이라고 물어 봤을 것 아닌가?

남편의 출근 준비로 한창 바쁜 우리집의 아침, 남편이 갈 곳 잃은 새처럼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또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인데 잘 찾아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차마 못 물어 보고 계속해서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남편이다. 으이구--하는 소리가 목까지 차는 순간이었지만 모르는척 눈을 돌리다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수건 아래에 빨간색 휴대전화 끄트머리가 보인다.

이거?
남편의 눈 앞에 휴대전화를 대령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이어지는 남편의 보물찾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는 대개 아침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부처님 손바닥 처럼 나는 남편이 다음에 찾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알면서도 척척 대령해 주지 않는 것이 남편은 서운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스스로' 단번에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는 연습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잘 해 두는 편은 아니지만 양말, 속옷, 아기 기저귀, 손수건 등등은 늘 같은 서랍장 안에다 넣어 둔다. 이를 테면 양말은 작은 서랍장의 가운데 칸에, 아기 손수건은 아기 서랍장의 세 번째 칸에 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침마다 '여보, 양말 어디있지?'를 하염없이 외쳐댔다. 남편은 늘 느즈막히 출근 준비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2~3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기 때문에 늦도록 잠을 못자고 시달렸던 탓에, 나는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해도 눈을 반쯤 감고 비몽사몽 아침상만 겨우 차려 주었었는데, 그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 '여보, 양말 어디있지?'는 결국 나의 버럭질을 유발했다.

결혼한지 햇수로 3년 째. 그동안 버럭 버럭 몇 번을 했더니 남편은 무언가를 찾아야 될 때 나에게 어디 있는지를 묻는 대신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 보거나 냉장고와 냉동실을 번갈아 가며 몇 번씩 열어서 원하는 것을 찾곤 한다. 미안하게...... .

paper heart
paper heart by tuli nishimur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대신 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할 땐 조금 더 친절해 지는데,
여보, 아기 서랍장 맨 윗 칸 오른 쪽에 보면 가위 손톱깎이가 있어. 그거 좀 가져다 주세요.
여보, 냉장고 문 열면 문쪽에 양념통 가득 들어 있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케찹 좀 꺼내 올래요?
...... .

문득 뜨끔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고 업무 시간에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도,
집에 있다가 갑자기 컴퓨터가 말썽이라고 징징대며 전화를 했을 때도,
생수통에 물이 떨어졌다고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을 때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그 쉬운 버럭질도 없이) 차근차근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었다.

남자와 여자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들이 기록된 갖가지 심리서적들을 섭렵했음에도 이렇게 이해심이 부족하다니!(뜬금없는 반성의 시간이다.) 버스 안에서 나를 씽긋 웃게 만들었던 휴대전화 속 할아버지처럼 남편이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물어 올 지라도 나는 너그러히 대응해 주어야겠다. 물론 나도 어찌할 바 없는 버럭질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등장할 지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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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 여닫는 소리, 부스럭부스럭 옷 갈아 입는 소리, 쏴-하는 물소리(오늘도 대충 씽크대에서 손을 씻었음에 분명한), 콜콜콜콜 정수기에서 물 받아 마시는 소리가 차례로 난다. 나는 남편의 나 왔어, 하는 소리에 큰 소리로 얼른, 응 어서와 하고 응수를 했지만 정작 반갑게 나가서 맞이하지는 못한다. 하필이면 남편의 퇴근 무렵에 다솔이가 응가를 했기 때문이다. 물휴지로 엉덩이를 대충 닦아 내고 다솔이를 어깨에 척 걸치게 안은 후 욕실로 데려가 엉덩이를 싹싹 씻어주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남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느새 후다닥 달려와서는 자신이 드디어 퇴근을 했음을, 퇴근한 자신을 반겨주고 하루 동안의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음 알리고자 했었다. 그러나 응가를 치울 때조차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들썩거리며 장난치는 다솔이를 한 손으로 제압하며 뒷마무리를 하고,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한 팔로 안은 채 다솔이를 씻기고 있었던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에게까지 신경을 써 줄 겨를이 내게는 없었다. 

등 뒤에서 뭐 하고 있어? 묻는 남편에게 반갑게, 밝게, 상냥하게, 사랑을 담아 대답해 줄 겨를이 내게는 없었다.
그저 귀만 쫑긋 세워 남편의 동선을 가늠함과 동시에 손으로는 계속 뽀드득 소리를 내고 있어야만 했다.

응, 왔어? 옷 갈아입고 거실에서 조금만 기다려줘. 저녁 차려 줄게. 건성으로, (보면 모르냐는 듯) 약간의 짜증을 담아서 대답을 한 후에 나는 다시금 다솔이 씻기기에 열중했다. 부스럭부스럭 옷 갈아 입는 소리, 쏴-하는 물소리와 손 씻는 소리, 콜콜콜콜 정수기에서 물 받아 마시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다솔이를 다 씻긴 후 피부가 건조하지 말라고 아기 로션을 발라주고,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는 보송보송하게 파우더도 발라주고, 깨끗하게 빨아 놓은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나니 다솔이가 새로 태어난 듯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이 정말 귀여워 보였다. 나는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동요 몇 곡을 순서대로 불러주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참! 남편이 들어왔었지? 아기에게 신경을 쓰느라 남편의 귀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남편이 텔레비전을 켜 둔 채, 소파에서 고꾸라져서 자고 있었다. 어찌나 깊이 잠에 빠졌는지 내가 곁에 간 줄도 모르고 쿨쿨쿨 자고 있었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꼭 쥐고서. 

남편의 자는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순간이 다시 없다는 듯 천천히 남편의 꼭 감은 눈이며, 굳게 담은 입 등을 자세히 살펴 봤다. 그런데 원래부터 남편의 얼굴이 이렇게 쓸쓸했던가? 밖에서 힘든 일이 있었던 까닭인지 남편의 자는 얼굴은 세상의 시름을 다 안고 있는 듯 슬퍼 보였다. 스마일맨의 얼굴을 완벽하게 거꾸로 그려 놓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기가 태어난 이후 내 모든 신경은 아기에게로 쏠려 버려서 남편이 찬 밥 신세를 면하지 못한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제대로 아침 밥을 차려 주지도 못했고 맘 편히 둘만의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다. 모든 사랑과 관심을 빼앗긴 채 늘 2순위로 밀려 났기에 어쩌면 남편은 허전함과 외로운 마음이 가득했을 지도 모른다. 언제였던가 앵앵 우는 다솔이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면서(?) 미워!라고 했던 이유도 같지 않을까?

나는 남편이 자는 동안 얼른 따뜻하고 맛있는 밥상을 차리고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말이다. 피곤한 듯 부스스 일어나는 남편의 얼굴이 참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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