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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심란하다. 이 모든 일을 고작 지난 일주일 동안 다 겪다니. 이런 우울한 일들이 거듭 생길 땐 양푼에 밥을 한 가득 비벼서 아구아구 먹는 것이 상책이라, 볼이 미어 터지도록 먹었더니 조금 기운이 생기는 것도 같다. 참 단순한 나, 이런 내가 올 해 서른 하고도 한 살이다. 여자 나이 31세가 많으면 많은 나이지만 또 적다고 한들 어떠랴. 아직도 많은 남성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여자들에게는 질투와 동경의 대상인 이효리도 나와 같은 79년생 양띠인데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가 겪은 이 모든 것들이 이효리를 따라 하려다 뻗친 망신살이기 때문에 결국 이효리와 나는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역설적이고도 기분 나쁜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동갑내기인 이효리와 나, 그러나 효리는 되고 나는 절대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1. 양갈래 머리
내가 생각해도 살짝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이 나이에 양갈래 머리라니! 그러나 친구들과 꽃구경을 가기로 한 그날의 날씨가 너무도 화창하여 나는 잠시 나의 나이 따위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만에 가는 나들이에 들떠 잠시 정신마저 나들이를 보내 버리고 너무나 생뚱맞은 차림으로 집을 나서고야 말았다. 연청색 멜빵 반바지(!)-남들은 짧은 치마도 입는 따뜻한 봄 날씨에 왜 유독 반바지는 아직 이르다며 눈총을 받는지 모르겠다.-에 빨간 꽃이 그려져 있는 흰색 져지 티셔츠를 받쳐 입고 울긋불긋한 색깔이 잔뜩 있는 운동화를 잘 차려 입었다. 이날 내 코디의 절정은 양갈래 머리. 멀리서 나를 발견한 내 친구들이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구박하기 전까지도 내 기분은 그냥 꽃과 같았다.

약속 장소로 걸어 가면서 '라라 라라라라 라라~ 날 좋아 한다고~' 이온 음료 광고에 나오는 음악이 나오는 듯 황홀경에 빠졌는데, 친구들의 냉정한 눈초리에 나도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드디어 미쳤구나 소리를 골백번쯤 들은 다음에 입을 삐죽이며 양갈래 머리를 풀어 하나로 묶었다. 대학에 강의 나가는 선생 꼴이 이게 뭐냐고 학생들하고 마주칠까봐 무섭다며 어찌나 구박들을 해 대는지 꽃구경은 하는둥 마는둥 후다닥 커피숍으로 숨었다. 강의 시간 외에는 나도 효리이고 싶은데 친구들은 내 맘을 너무 몰라준다.

2. 눈 웃음
꽃놀이 사건이 있은지 며칠 후 퇴근길 지하철에서 대학 선배와 우연히 마주쳤다. 98학번인 나와 93학번인 선배가 졸업한 이후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에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내가 새내기였을 때 3학년 복학생이었던 남자 선배는 나에게 까마득한 존재였다. 그런 선배와 딱 마주치니 마치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 듯 해서 기분이 참 좋았다. 학교 축제며 과 소모임 활동 등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옛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눈 웃음을 지었나 보다. 그 순간 선배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와 역시 세월에는 장사없구나'하는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을 뱉는 것이 아닌가.

너 신입생 때는 그렇게 파릇파릇 하더니 오랫만에 보니까 많이 늙었다는둥, 자세히 보니까 피부도 까칠하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하다는둥, 왠만하면 눈은 웃지 않는게 좋겠다는둥 처음과는 달리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갔다. 물론 옛날부터 장난기가 많던 선배가 나를 골리려고 더 심하게 그러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심히 마음이 상했다. 눈 웃음이 매력적인 이효리는 그 웃음 하나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던데, 나는 오늘부터 눈은 덜 웃고 입만 웃는 웃음을 연습해야만 하는 것인가.


3. 생얼
그리고 바로 오늘이다.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문득 맨 얼굴이 청초해보이는 것이(이게 다 백열등의 장난이다.) 그냥 출근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오후에는 일이 없어서 집에도 일찍 들어 올텐데 공들여 화장할 필요가 있겠냐는 핑계도 생겼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보면 자다 깬 효리는 맨 얼굴도 예쁘던데, 나도 가끔은 사람들에게 내 앳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과대망상까지 생겨서 간단히 선크림만 바르고 룰루랄라 출근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늦잠을 잤으면 비비크림이라도 듬뿍 바르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뭘 믿고 그 얼굴로 그리도 당당하냐는 조롱과 함께 도대체 누구시냐는 괘씸한 장난까지 다들 나를 들들볶는 말 뿐이었다. 친한 사이기에 처음에는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지만 점심 먹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맨 얼굴이 추하지는 않지만 추레한 것은 사실이다'라는 말로써 굳이 내 마음을 후벼판 나쁜 사람들. 역시 이효리와 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나보다.

아까는 그리도 기분이 나쁘더니 밥 한 양푼을 비벼서 배 부르게 먹고나니 금세 별 일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효리처럼 예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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