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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별 생각없이 차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줌마들은 참' 하는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남자친구를 봤더니 뾰루퉁해져서는 눈짓으로 대각선 뒷쪽을 가리킨다. 내 귀에는 차들이 오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리는 소리 사이에서 그제서야 한 아줌마가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저 아줌마 목소리가 시끄러워서?'
'응. 근데 너무 이상한게 아줌마들은 꼭 저런 목소리더라.'
'저런 목소리라니?'
'굵고 큰 소리말야, 시끄러워서 돌아보면 백발백중이야. 아줌마인게 확 티나지. 아줌마들은 왜 꼭 저러는지 모르겠어.'



아뿔싸. 내 남자 친구에겐 누나가 없었지. 남자 친구의 볼멘 소리에 대충 맞장구치면서 호응해 주고는 말끝을 흐렸지만, 순진한 이 남자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관해 잘 모르는 듯 했다. 남자들이 잘 모르는 여자들 내숭록 1장 1절에는 상황과 기분에 따라서 베이스와 소프라노를 넘나드는 목소리편이 존재한다. 나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살아 온 남동생마저 놀라게 하는 목소리 기술의 보유자이기에 조금 전 남자 친구의 목소리 운운에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전화를 받을 때와 집 밖에서 가족 이외의 사람들을 만날 때는 가늘고 높은 소프라노 목소리를 유지하지만 나라고 늘 상냥할 수 있겠는가. 평상시 가족들을 대할 땐 알토 정도의 심상한 목소리를, 동생이 깐죽댈 땐 힘차면서도 굵직한 테너의 목소리를, 동생과 심하게 싸우거나 모든게 귀찮을 땐 저음의 베이스 소리를 큰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발성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천재적인 목소리 변주가 어렸을 적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었고, 성장해 가고 사회 경험이 다양해질 수록 계속 계발되면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의식적으로 바꾸어야만 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인공지능으로 알아서 척척 바뀌어지는 것이다.


내가 집에서 동생과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특히 남자들의)를 받을 때, 내 동생은 갑자기 급상승하는 내 목소리 톤에 놀라고 가증스러워서 도끼눈이 된다. 삼십 년을 봐 왔어도 여전히 못마땅하기 때문이겠지만 내 동생은 나로 인해 여성들의 놀라운 목소리 변주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았을 것이다. 내가 잘못 걸린 전화에도 이미지 관리를 한답시고 상냥함을 유지할 때 동생은 어이가 없어서 소파 위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인공지능 목소리 바뀜이기에 알아서 척척이니까 잘못 걸린 전화라고 해도 낯선 사람에겐 소프라노이다.

다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버스 안에서 아줌마가 유독 굵고 거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한 까닭은 상대가 아주 친한 사이이거나 가족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비록 아줌마는 집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테너에 가까운 소리를 냈지만 그것은 아줌마가 처한 상황에따라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재설정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유자재로 쉽고 편리하게 바꿀 수 있는 목소리이긴하지만 매순간 적절한 소리를 내는 것이 사실은 은근히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50대로 보이는 아줌마 또래에겐 이제는 별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더 쉽고 간결한 방향으로 목소리 변화의 폭을 줄였을 수도 있다.


누나와 여동생이 없어서 여성들의 내숭에 관해서 잘 모르는 남성들은, 방심한 여자 친구의 낯선 목소리를 듣더라도 크게 놀라지 마시길 바란다. 잠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문제가 발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여자친구에게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리더라도 가끔은 모른척 눈감아 주시길 바란다. 늘 상냥하고 고운 목소리를 내는 일도 은근히 피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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