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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으로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무한도전의 귀염둥이(?) 도니도니 정형돈?
최근에야 진상 캐릭터에서 미친 존재감으로 정형돈의 위치가 격상했지만, 존재감이 미미하여 참 고민도 많았을 그 때 그 시절, 정형돈을 그나마 기억할 수 있게 도왔던 것이 바로 진상 캐릭터였다.

그런데 진상이 뭐지? 국어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신조어 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혼자 사는 집을 급습한 적이 있다. 오후 두 시쯤, 해가 중천을 넘어 슬쩍 기울어갈 때인데도 형돈이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는지 퉁퉁 부은 눈에 까치 머리를 하고 눈만 겨우 뜬 채 무한도전 멤버들을 맞았다.

도둑이 들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도통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진 거실과 그 틈에 섞여 있는 음식물 찌꺼기들, 그리고 낡아 빠진 옷들과 운동화. 그 아수라장에서 정형돈은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고로 멋지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형돈의 모습. 그게 바로 진상이다. 검색창을 통해 찾아보니 가장 많은 대답이 '꼴 보기 싫은 짓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진상이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도 참 진상이었다.

결혼 후 아이가 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남이섬에 1박 2일로 놀러갔을 때, 나는 당연히 그 다음날에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놀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야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블로그에도 올리고 길이길이 보존할 것이 아닌가?

여행의 첫 날 근사했던 바비큐 파티를 마치고, 낯선 환경 때문에 칭얼대는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남은 수다까지 마저 떤 후에 늦은 시각에 잠에 들었지만 나는 한껏 치장을 하고 남이섬으로 들어갈 생각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 아빠들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씻는 순서를 생각해서 한 명씩 일어나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던 듯......

그 사이 아이가 잠에서 깼는데 아이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지 줄줄이 다른 아이들도 일어나서 엄마를 찾았다. 나는 얼른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멋을 내 보려 했는데 분위기를 살피니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대세에 따르는 수밖에. 샤워는 커녕 머리도 안 감고 세수만 살짝한 후 비비크림만 발랐는데 그 때까지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남아돌아 나는 홀로 아침밥도 하고 찌개도 끓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지만 떡진 머리와 밋밋한 얼굴로 남이섬에 갈 생각에 기분이 영 별로였다.

다행히 잘 놀고 집으로 돌아 오면서 남편에게 슬쩍 이런 마음을 이야기 했더니, 남편은 나에게 M.T에서 샤워하고 머리 감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런가?




여보, 사실은... 나 이런 사람이었어.

대학 때야 워낙 많은 사람들이 M.T에 가기에 그럴 여력도 없넜지만 나는 대학원 M.T때 잠옷을 챙겨갔었다. 해당 교수님과 박사과정 선배들, 그리고 석사과정 동기 몇 명, 모두 다해 봐야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들끼리 간 M.T였고 방도 2인 1실이었기에 나는 잠옷을 입고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M.T 장소에 도착 한 후 편안 옷으로 갈아 입은 다음, 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먹다가 다들 그 차림 그대로 잠이 드는 것 같았는데 나 홀로 내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 입고 잠을 잤다.


그리고 더 압권은 남편과 사귀고 있던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일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좀 더 재미있게 보내고자 한 친구가 (부모님께서 여행 가신 틈을 타) 자기 집에서 조촐하게 파티를 열었다. 모두 스무 명 정도가 그 친구 집에 모였다. 우리는 각자 준비해 온 선물 교환도 하고, 배달 음식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먹고 게임도 하면서 늦은 시각까지 놀았는데, 원래 계획은 밤에는 찜질방에서 뜨끈하게 지지고(?) 땀을 흘리면서 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밤이 되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일정을 바꾼 것이다. 나는 원래부터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기 때문에 뜨뜻한 찜질방을 오가면서 피곤을 풀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이 적어졌으니 그냥 그 친구 집에서 거실과 방 두 개에 나누어 자도 되겠다는 결정이 났다. 뜨뜻한 찜질방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 나질 않았다.

찜질방, 찜질방, 찜질방. 결국 나는 친구의 동의를 얻어, 다른 사람들이 DVD 영화를 보는 틈에 친구 집 욕실에서 삼십 분 이상 반신욕을 했다!!!!!!!!!!!!!!!!!

그렇다. 나는 진상이었던 것이다.




남이섬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옛 추억을 되짚어 봤는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진상이었다. 친구집에 화장실이 두 개였던가? 내가 삼십 분 이상 홀로 뜨끈함을 즐기며 반신욕을 할 때 다른 사람은 요의를 참으며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겠지?

그 당시 그 친구 집에는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조금 낯선 사람들도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난 후 어떤 여자 후배가 나에게 인사를 했을 때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자, 그 날 일을 이야기 했었다. 언니 그 때 크리스마스 이브 때 같이 놀았었잖아요? 그 날 언니 반신욕하고...... 그래. 나는 진상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를 쥐어 뜯으며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나의 진상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봤을 여러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진상이 좋은 이유도 하나는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비록 꼴 보기 싫은 사람으로 남을 지라도) 강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형돈이가 안 웃긴 개그맨으로 통하던 그 시절, 자신의 존재없음에 고민을 하다가 만들어 낸 캐릭터가 진상 캐릭터였듯, 그 옛날 열렸던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를 떠 올리면 '남의 집에서 반신욕 하던 진상 언니'는 기억날 테니 말이다. 아, 앞으로는 진상 떨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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