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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 일이 있어서 외출한 남편.
아이에게서 콧물 기침 감기가 옮아 훌쩍 훌쩍 캘록 캘록, 홀로 고단하게 아이를 돌보는 힘들고 지친 주말 오후가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같이 감기를 앓으면서도, 콧물은 나보다 훨씬 더 심하면서도 깨어 있을 때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온 집안을 활개치는 다솔이,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끝없이 푱푱푱 샘 솟는 것일까?

아이와 시계를 번갈아 보면서,
한 손으로는 책상 위에 올라가 흔들거리는 아이의 다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편에게 언제 오느냐는 협박성 문자를 날리면서 속으로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어 거의 뿜어내기 일보직전!! 지원군 남편이 돌아와 주었다. 우리 세 식구가 함께 한 주말 저녁이 말 그대로 휙 지나가 버리고 한밤 중 나만 홀로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 밤. 너무 허무하게 지나가 버려 도저히 그냥 잘 수 없었던 이 밤에 나는 창고방을 뒤집기로 맘 먹었다. 

이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창고방 속 커다란 상자에는 오래 전부터 잡다한 물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는데 이사 날짜가 밀리고 밀리고 밀려서 취소가 되었기에 이제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춰봐야 될 시점이 되었던 거다.

애걔! 겨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상자 속에 가득했다. 공예용 철사 무려 세 꾸러미, 이제 그만 버려도 될 낡은 여행 가방 몇 개, 왜 넣어 둔 지 모르겠는 플라스틱 컵들, 그리고 버리기도 가지고 있기도 애매한 임용 고사 시험 준비용 책만 잔뜩...... . 실망하다가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상자를 발견했는데 그게 진짜 보배함이었다. 

보배함을 속에는 2004년부터 시작되었던 우리의 추억들이 가득들어 있었다. 연애 시절에 남편과 찍었던 사진들, 주고 받았던 편지와 성탄 카드들. 그리고 잃어 버린 줄 알았던 타임 캡슐까지. 특히나 타임 캡슐은 2010년에 열어 보기로 하고 쓴 것인데 너무 꽁꽁 숨겨 놓은 나머지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포기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봉인되었던 남편과 나의 타임 캡슐 속 사랑 편지가 
2011년 1월의 어느 밤에 우연하게 발견된 것이다!


위의 편지가 2004년 5월 5일에 써서 2010년에 열어 보자고 했던 우리들의 타임 캡슐이다.
말로만 타임 캡슐이지 실은 가지고 있던 싸구려 편지지에 써서 결혼 전에는 내 방에, 결혼 후에는 우리 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편지에 불과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남녀 주인공이 튼튼한 철재 상자에 고귀한 무언가를 넣고 머나먼 산꼭대기에 올라가 크고 곧게 뻗은 나무 밑을 파고 묻는 것이 타임 캡슐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나에게 그런 방법은 옳지 않다.


주황색 편지지에 1번부터 15번까지 항목을 적고, 각자 항목에 맞게 자신의 이야기를 쓴 다음 파란색 편지 봉투에 질문지와 같이 넣어 보관해 두었었다.

질문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처럼 손발이 오그라 드는 유치한 것도 있고, '2006년에 유행하는 것들'이라는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있으며, 연인이 쓴 것에 걸맞게 '서로에게 해 주고 싶은 것, 해 주고 싶은 말'을 쓰라는 것도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만의 타임 캡슐 편지를 읽노라니 다시금 2006년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요즘 아이를 기르느라 진이 너무 빠져서 서로에게는 조금 소홀해진 면도 있는데, 늘 따뜻했고 배려심 넘쳤던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유해진 나오는 그 광고를 볼 때마다 너무 반성된다.) 계속 노력하며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끼리의 타임 캡슐이라 손발 오그라드는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좀 민망하고, 2006년에 유행하던 것들을 같이 추억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면,

2006년에 유행하던 것들

내가 쓴 글 : 왕의 남자의 흥행과 공길 역 이준기의 영향으로 예쁜 남자 신드롬이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이준기가 광고한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음료수도 함께 유행하고 oo(남편 이름)이의 머리 모양인 포일 파마도 인기가 있고, Dr 깽(드라마)에서 한가인이 입고 다니는 공주풍의 긴 레이스 치마도 유행이고, 아! 밑으로 갈수록 단이 좁아지는 스키니 바지도 인기다.

남편이 쓴 글 : 포일 파마, 스키니진, 공주풍의 옷, 축구, 소형 타블렛 노트북, 블루투스, LCD 대형 TV.

그리고 남편이 썼던 내용 중에 철사 공예에 관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에(예를 들면, 앞으로 나에게 철사 공예로 장신구를 100개 만들어 준다느니, 100만원 어치의 철사를 사고 싶다느니......) 아까 사 놓고 쓰지도 않은 철사 뭉치들을 발견한 후 치밀어 올랐던 화가 싹 사라졌다.(남편은 결혼 전 나에게 선물을 하려고 철사 공예를 배웠었다)

타임 캡슐을 읽다가 싸이월드에 우리 연애담이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사진을 찾아 봤더니 역시 있었다. 사진에 따르면 우리는 일찍부터 만나서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 글을 쓰고 영화(도마뱀)를 봤다.

짜잔, 2006년의 우리다.



남편과 함께 2015년에 뜯어 볼 새로운 타임 캡슐을 얼른 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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