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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는 책,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은 연애 시절에 샀던 소설이다. 사귄지 얼마되지 않아서 샀던 것 같으니, 제목은 저래도 속 내용은 낭만적이지 않았을까? 제목처럼 남자 친구의 등짝을 있는 힘껏 발로 차 주고 싶을 만큼 꼴보기 싫은 일이, 갓 사귄 연인에게서는 있어서는 안 될테니 말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본 소설이 나에게는 늘 그렇듯(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도 눈만 껌벅인 나다.) 한 번 읽고 구석에 쳐박아 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려 6년 전에 읽었던, 내용도 기억 안 나는 소설의 제목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은, 바로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옛 소설을 떠올리며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이유는......?




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아버지께서는 술을 '안' 드시는 것이 아니라 '못' 드시기에 우리집에서 술을 보는 일은 일 년에 단 몇 번 뿐이었다. 그것도 맥주로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술에 취한 사람은 딱 질색이다. 아-- 술 취한 사람들의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무한반복형 주사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아버지께서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술을 즐기지 않으시기에 늘 퇴근하고 나서도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와 놀아주시거나 다른 일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 가끔 남편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술 취한 기색을 보이면 나는 별다른 응수를 하지 않은 채 남편을 얼른 재우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순간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잔소리는 전혀 하지 않지만 당신의 주정을 받아줄 의사는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절대 방전되지 않는 건전지를 끼운 것 같은) 아기를 돌보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줘야 할 이 시기에,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평소와 다른 말투와 행동을 보일 때면, 내 얼굴이 '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빠를 기다리는지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는 결코 잠을 안 자는 아기를 안고 밤 12시가 넘는 시각까지 동동거렸는데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은 아기 한 번 안아주지 않은(못한??) 채 잠에 들어 버렸다.

쿨쿨쿨, 이럴 때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편의 등짝을 보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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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t up some prints today... by decor8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계획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 있다. 거실과 주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남편에게 끊임없는 텔레파시를 보내느라 골치가 다 아플 지경인데도 꿈쩍 않고 앉은 채로 거실에 있는 남편, 내가 말 대신 효과 없는 텔레파시를 계속해서 보내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그 '어렵다'는 시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시어른들을 만나도 어쩔 수 없이 시댁은 시댁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만 끝내고 바로 출발해도 백만 년 만에 다시 가 보기로 한 청계천 나들이에 한참이나 늦을 텐데, 남편은 이런 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하하하 속 없이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저녁에 가면 더 좋다는 청계천에 오랫만에 놀러 좀 가 보나 했는데, 오락 방송을 보며 그 속의 일환이라도 된 양 희희낙락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눈치를 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이럴 때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자'고 해 주면 진정으로 고마우련만, 쿠션을 끌어 안고 텔레비전 앞에 바싹 붙어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남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계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결국 스스로 청계천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내일 또 출근해야 되는데 그냥 조금 더 여기서 쉬다가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낫지. 오히려 더 잘 됐다 생각하고 나도 재미있게 웃으며 오락 방송을 보는데, 눈 앞에 저녁 먹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등짝이 보인다.

정말, 발로 차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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