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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때문에 맘대로 놀러 다니지 못했던 기간 동안(게다가 컴퓨터까지 고장이 나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리 재료를 잔뜩 사서 냉장고 속을 가득 채워 넣었다.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여 가던 요리책 두 권을 적극 활용해서 이번 기회에 요리 연습을 해 볼 참이었다. 내 요리책은 모두 두 권인데 둘 다 정말 제목이 소박하다. 나 또한 거기에 끌려서 이 책들을 사게 됐지만 이제 막 자취를 시작하는 학생들이나 처음으로 요리를 배워보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손에 집어 봤음직한 책들이다.

정확한 책 제목을 쓰기는 그렇고 대충 뜻을 전달해 보자면, 한 권은 2천원으로 만드는 멋진 요리를 다른 한 권은 3천원으로 맛있는 음식점을 흉내내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주부 9단들은 요즘 물가에 2, 3천원으로 무슨 음식을 만들겠냐고 하시겠지만 딱 1~2인분을 만드는 요리법이기에 장을 잔뜩 봐 두고 같은 재료들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게 되면 하나의 음식당 재료비가 2, 3천원 쯤 든다는 말이다.(정확하게 따져보면 2, 3천원이 넘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부담없다는 뜻으로 받아 들이면 된다.)

 내가 외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는지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다. 모양도 그럴싸하고 맛도 그럴싸해서 음식을 만들어 볼 수록 자신감이 마구마구 생겼다. 요리책을 참고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을 내기 위해 조금씩 요리법도 바꾸어 보고 재료도 더 넣으니 마치 내가 새롭게 창작한 음식인 것 같은 착각도 들고 아무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감자를 삶아 으깨서 견과류를 부숴 넣고 잘게 썬 양파도 넣고 슬라이스 치즈도 녹여서 넣은 다음 마요네즈와 허니머스타드를 섞어서 샌드위치를 만드니 정말 맛있었다. 더 강한 맛을 원할 땐 핫소스나 케찹을 미리 식빵에 발라서 속을 채우면 더더욱 맛있는 샌드위치로 변한다.

같은 재료로 또 다른 음식을 만들 수도 있다. 감자를 삶아 버터를 녹여 으깨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다음, 적당량의 물과 우유를 넣고 잘게 썬 양파, 햄과 함께 끓여 내면 정말 그럴싸한 스프가 된다.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분들도 끓인 우유는 부담이 덜 할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시면 간편하면서도 든든한 아침 식사를 즐기실 수 있다. 소시지 야채볶음도 만들었고, 꽈리고추찜도 만들었고, 어묵 볶음, 오징어채 무침, 깍두기 등 밑반찬도 흐뭇하게 잘 만들어 냈다. 그러던 중에 초복이 와서 삼계탕으로 몸보신도 했고 점점 더 나는 기고만장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호박죽과 단호박 샐러드에 도전을 하기로 했다. 단호박죽은 미용에 정말 좋을 것 같았고 단호박 샐러드는 피자집에 가서 내가 정신없이 먹는 메뉴이기 때문에 정말 기대가 컸다. 이 두가지 음식을 만들려면 먼저 딱딱한 단호박을 잘라서 삶아야 되는데 단호박을 갈라서 껍질을 벗기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찌나 딱딱한지 식칼이 잘 들어가지도 않아서 마늘 빻는 방망이로 칼을 두드려 가면서 호박을 가르고 씨앗을 파냈다. 그런데 자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호박 껍질을 벗겨 내는 일이었다. 과도로는 어림도 없어서 식칼로(!) 껍질을 조심조심 벗겨 냈는데 위험한 작업이라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한 조각을 남기곤 칼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아프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얼른 지혈을 하고 소독약을 발랐지만 피는 좀처럼 멎지 않았다.

그래도 음식을 하다가 말 수는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호박을 삶고 호박죽과 호박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던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찹쌀 가루로 만든 새알심도 물 조절 실패로 동그랗게 만들어지지 않고 끓이는 도중 다 풀어져 버려서 호박과 섞이게 됐고 맛은 또 왜 그리 느끼한지 정말 호박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냥 삶아서 먹을 것을! 샐러드는 더 처참했다. 호박죽을 설탕으로 간 했으니 샐러드는 소금으로 간 해서 짭짤하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소금을 넣었는데 너무 많이 넣은 것이 문제였다. 도저히 그냥 먹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까운 것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호박죽은 노란 부분만 걷어 먹고 샐러드는 식빵에 속으로 넣어서 샌드위치로 먹어 보려고 한다. 비록 손은 다치고 음식은 망쳤지만 실수를 하면서 실력이 늘어갈 것이라고 위안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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