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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떤 모임에든 꼭 지각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가끔씩은 늦을 때가 있어서 그리 떳떳하지는 못한 처지지만, 이 친구는 해도해도 너무하다. 10분은 기본이고 30분 지각은 애교인 이 친구가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은 도끼눈을 뜨고 한마디씩 하는데, 그녀는 그럴 때면 다시는 늦지 않을 것 처럼 각오를 다지고 필살기인 눈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배시시 웃으면서 꽈배기 처럼 몸을 꼬는 폼새가 얄밉긴 해도 우리는 못 이기는 척 용서를 해 주고 말지만 사실은 모두들 그녀의 정시 도착을 포기한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모임 장소를 정했지만 40분이 넘도록 콧배기도 보이지 않는 그 친구 때문에 다들 흥분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다음부터는 약속 시간을 삼십 분 일찍 얘기해주자느니, 계속 이런 식이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느니 등의 이야기를 떠들다가 제 버릇 개 못 준다던데 이제 그만 포기하자는 심드렁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랬다가도 언제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얼굴을 하고 몸일 배배 꼬아대며 애교를 부리는 지각대장이 도착하고나면 별일 아니었다는 듯 눈 한 번 흘길 뿐이었다.


며칠 전 영화 시사회 응모에 당첨이 돼서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 시사회는 보통 두 명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기 때문에 나는 지각 대장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마침 그 날은 친구의 집과 별로 멀지 않는 곳에서 볼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끝낸 후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좀 쉬었다가 친구와 함께 극장으로 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나서 그녀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 영화 시작은 오후 8시, 친구 집에서 극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분 쯤 걸린다. 7시쯤 출발하면 여유있게 영화표를 받고 음료수도 좀 마시면서 느긋하게 영화를 기다릴 수 있다. 나는 그 날 종일 집에 있었던 친구가 미리 외출 준비를 다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지각이 반복되는 대는 이유가 있었다.

완벽한 야생의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그 친구를 보며 나는 묘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그녀와 학창시절 때부터 친구였지만 그녀의 외출 준비 과정을 지켜 볼 기회는 없었기에 좀 미안하지만 오늘은 '지각의 이유'를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친구가 나를 의식하지 않고 평소대로 외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고 그녀가 어떻게 하는지를 엿보기로 했다.

현재 시각 5시 40분, 나 같으면 먼저 씻고 나서 저녁을 먹을텐데 그 친구는 아직 여유가 많다며 김치볶음밥을 해 먹자고 한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김치와 참치를 프라이팬에 볶는 친구,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오랫만에 온 손님을 부려먹을 수 없다며 기어이 손수 차려 주겠단다. 김치 볶음밥을 먹다 남은 콩나물국과 함께 맛있게 먹고 치우니 6시 20분이 조금 넘었다. 이제는 슬슬 준비를 하려나 했는데 배가 부르다며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는다. 준비해야하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 말았다. 6시 30분이 다 돼서야 욕실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쏴 하는 물소리가 끊이질 않더니 친구는 20분이나 지난 후에 짠 모습을 드러낸다. 발그레한 볼을 하고서 날씨가 추울 땐 따뜻한 물만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없다며 착하게 웃는 그녀를 어떻게 미워할까. 현재 시각 6시 50분, 스킨과 로션을 바른 친구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케이블의 재방송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하하하 웃는다. 그래도 서두르면 예상 출발 시간인 7시에 맞출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친구는 이미 본 방송임이 분명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힐끔힐끔 곁눈질로 방송의 흐름을 살피며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늦은 시각에 하는 외출임에도 어찌나 정성껏 바르던지 대충 비비크림만 바를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곱게도 치장하는 그녀, 그녀가 점점 더 고와질 수록 나는 점점 더 부아가 치밀었다. 아예 친구쪽을 보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과월호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깔깔대는 친구. 놀라서 쳐다보니 볼터치를 하다말고 다시 예능 프로그램에 빠졌다. 이미 시간은 7시를 훌쩍 넘었다. 시사회라서 영화표를 받으려면 늦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아무말 하지 않으리라던 결심을 깨고 친구에게 최대한 심상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여기서 ㅅㅇ극장까지 얼마나 걸리지?

아무튼 아주 가깝다는 친구의 짧은 대답, 눈은 아직도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다. 얄, 미, 운, 뒤통수. 드디어 화장을 마치고 입고 갈 옷을 고르는 그녀. 선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 고민하는 거 아니니. 미리 생각을 좀 해 두지 많지도 않은 옷을 들었다놨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미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고 나는 여유고 뭐고 8시까지 가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불안해서 손에 땀이 다 날 지경이었는데도 친구는 천하태평이다. 맘 급한 내가 현관에 서서 기다리니 조금 늦으면 될 걸 뭐가 그리 조급하냐며 오히려 나를 달래돈 친구는, 신발을 신다말고 아! 하며 휴대전화를 찾으러 다시 들어간다. 뒤이어 아! 아!를 두 번 연발하더니 교통카드와 열쇠를 못 찾겠단다. 현재 시각 7시 40분.

새삼스레 다시 둘러 본 친구의 집은 자세히 보니 정리 정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친구는 자신의 물건이지만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듯 했고 그래서 나도 같이 전날 입은 옷의 주머니와 침대 뒷편까지 샅샅이 다 찾아봐야만 했다. 결국 열쇠가 발견된 건 냉장고 위였고 교통카드는 책상 서랍에서 나왔다. 우리 극장으로 가다가 다리를 삐어서 늦었다고 할까? 아님 시간을 잘못 알았다고 할까? 출발과 동시에 변명거리부터 생각하는 그녀. 지각이 몸에 배 버린 그녀 때문에 나는 정말 곤란했다. 아, 나는 정말이지 그 다음부터의 일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혹시 내 친구와 같이 지각을 반복하시는 되는 분이 있으시다면, 2009년에는 다음의 습관들을 꼭 버리셔야만 한다.

1. 준비를 하면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2. 물건을 제 자리에 두지 않는다.
3.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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