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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내년엔 멋진 남자친구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 내년엔 꼭 승진을 하고 싶은 마음, 내년엔 기필코 결혼을 하고 말리라는 마음, 내년엔 어여쁜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 내년엔 가족과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픈 마음...... .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2009년을 설레며 기다리는 지금, 그래서인지 유독 새해 일기장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

나도 작년 일기장의 여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슬쩍 2009년형 일기장에 손길이 간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는데, 캐캐묵은(?? 사실은 겨우 1년된) 일기장에 내 새로운 계획들을 넣을 수는 없지. 예쁜  새 일기장을 또 사고 싶어서 속이 빤히 보이는 자기위안으로 나를 속이면서 말이다.
 
나에게는 예전에 비해 일기장을 가득가득 채우지 않게 된 계기가 있다.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좋아하고 시시콜콜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나였었기에 매해 큼지막한 일기장을 준비하고 그 해가 다 가기전에 빼곡하게 모든 여백을 채웠었다. 친구와 싸웠던 일부터 외식했던 기록과 영수증, 좋아하던 선배에 관한 마음까지 그 해에 나에게 일어났던 거의 모든 사실을 일기장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기장은 내 삶 그 자체였고 나는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일기장을 채우는 일이 눈에 띄게 게을러졌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 해 새롭게 일기장이 등장할 때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쪽으로 저절로 눈이 가게 된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소설을 보다가 훔치고 싶은 글귀가 있어서 일기장을 펴 그 내용을 옮겨썼다. 나를 매료시켰던 한 단락의 내용을 모두 옮겨적고 나서도 내내 그 소설에 취해있었는데, 정신줄을 잠시 놓쳤는지 그만 일기장을 도서관에 두고 와 버린 것이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고 다음날 도서관에 가 봤지만 일기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내 삶의 기록들이 빠짐없이 적혀있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것 같았다. 그 후 몇 주가 지나도록 일기장은 소식이 없었고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기장을 장만해야 할 지 이제 일기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지를 결정하려는 즈음에 전화 한 통이 왔다.

모 동아리방이었다. 한 여학생이 책상 속에서 발견하고는 연락처를 찾아 내게 전화한 것이었다.  내 일기장이 왜 그 동아리방의 책상 속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것을 수습하러 갔다. 왠지 그 동아리의 모든 사람이 내 삶을 낱낱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정말 부끄러웠다. 타인의 손을 탄 내 일기장은 나에게로 돌아온 지 몇 주가 지나도록 외면을 받았다. 어떤 얘기를 써 놓았을 지 너무나도 걱정이 됐기에 그것을 펼쳐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한 달이 지난 이후에야 다시 일기장을 열어 볼 수가 있었지만 그 전처럼 속속들이 내 삶을 적어 둘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는 일기장 쓰는 방법부터가 달라졌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메모하는 것과 잊어버리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기록해 두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내 시시콜콜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방심한 사이 타인에 의해 내 감정이 들추어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니 그 때의 당혹감이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금 일기장에 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기발하고 갖고 싶은 일기장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2009년형 일기장의 유혹에 못 이겨 결국 올해도 새로운 일기장을 사 버린 나는 이 일기장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일기장에 진실을 담을 수 없게 된 내 잃어버린 순수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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