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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에서 박진희의 일명 '지하철 실수담'을 들었다. 박진희라 하면 청순과 도발을 겸비해 누구나 매력녀로 인정할 만한 여배우이다.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여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들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데뷔 전 박진희는 승객으로 가득찬 지하철을 탔다고 한다. 당연히 좌석도 없었고 앉아 있는 사람과 바짝 붙어서 서 있던 박진희는 떠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자신도 모르게 앞에 앉아 있던 남자의 무릎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단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라 크게 당황한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했고 갑자기 당한 사람도 경황 없기는 마찬가지라 민망한 정적만 흘렀다고 한다. 만원 지하철엔 사람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렇게 낯선 남자의 무릎에 앉은 채로 박진희는 네 정거장을 더 갔고, 다행이 그녀가 내리려던 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어색한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얘기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들어닥칠 때면 의도하지 않게 깊숙히 밀려가 버릴 때도 있고 그러다 중간에 끼기라도 하면, 키가 작은 나는 숨 쉬기 조차 힘들다.



'으흐흐' 박진희의 실수담을 듣고 있노라니, 내가 저질렀던 음흉한 일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괴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어여쁜 박진희는 실수였지만, 음흉한 나는 고의적이었고 청순한 박진희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약아 빠진 나는 교묘히 미안한 척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었는지 나조차 어이가 없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소싯적 순정만화와 허튼 연애 소설을 너무 많이 봤던 까닭이 틀림없다.

20대 중반이었을 때, 나는 괴이하고도 무모한 짓을 참 많이도 저질렀다. 더 어렸을 때 못 해 본 것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때부터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해 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 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오늘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나는 정말 우습게도 이따금씩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화장도 곱게 잘 됐고 옷차림도 너무나 맘에 들어서 그런 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지나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럴 땐 나 스스로 무언가 낭만적인 일을 꾸미고야 말았고 철저한 철면피로 둔갑했다.


그 때도 그랬었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을 것이다. 대학원 수업은 보통 늦게 끝나기 때문에 약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반대편 차창으로 비친 내 모습을 보았고 나는 그만 나르시시즘에 빠지고야 말았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미모로써 특별한 일 없이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니! 너무 너무 아까워...... . 그러다 내 머릿속을 음흉하게 채우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서 집까지 가는 것. 어떻게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라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지만 그땐 아직 어렸고(20대중반인데???) 앞에서도 얘기했듯 나는 순정만화와 하이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물론 만화에서 조차 주인공이 상황을 고의적으로 꾸미지는 않지만, 책에서는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는 경우가 참 자연스럽고도 예쁘게 묘사돼 있지 않은가? 나는 반대편 유리창으로 적당한 상대가 나타날때까지 설레는 맘을 안고 기다린 다음, 착해보이는(이게 중요하다) 순진한 희생양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졸리는 척 하면서 말이다. 시간도 얼추 늦었고 일부러 그런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도대체 몇 명??) 그냥 어깨를 빌려준다. 내가 생각해도 예쁘다고 느낄 때만 하기 때문에 당당하고도 뻔뻔하게 낯선 이의 어깨를 빌린다. 그러다 내가 내릴 지하철 역이 되면 그제서야 잠에서 깼다는 듯 스르륵 일어나서는 깜짝 놀라는 척을 좀 하고, 상대방에게 '미안합니다' 인사 후 나는 유유히 퇴장.

당시 같이 대학원 다니던 오빠들에게 실수인 척 슬쩍 물어보니 자신들도 당한(?)적이 있는데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피곤한 퇴근길에 삶의 활력소(--라고 할 것까지야)가 되어주는 '무단 어깨 빌리기'를 한 번 시도 해 보심이 어떨지? 단, 뻔뻔한 여성들에 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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