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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들은 엄마들에게서 참 많은 당부를 받는다. 남편에게 내조는 어떻게 해야 하며 시부모님 봉양은 어찌 해야 되는지 등등등. 결혼 날짜를 잡고 나서부터 엄마는 '행복한 가정 꾸리기' 강좌 쯤 되는 이야기들을 틈만 나면 하시더니, 드디어 결혼식 하루 전이 되자 내 손을 꼭 잡으시곤 마무리 특강을 하셨다.

결단코! 집에 있을 때 남편의 늘어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지 말것이며, 식탁 위에 남은 밥이며 반찬들을 탐하지 말지어다.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눈 딱감고 버릴지어다, 버릴지어다, 버릴지어다.

결혼 전날 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내 평생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거라는 호언장담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멀쩡한 내 옷 놔두고 뭣 하러 남편의 옷을, 그것도 늘어진 티셔츠를 주워 입겠으며 이미 식사를 마쳤으면 당연히 배가 부를 것인데 왜 먹다 남긴 반찬을 아구아구 먹는단 말인가. 아마도 강좌의 기간이 너무 길어져서(상견례 이후 6개월 뒤에 결혼을 했다.) 엄마께서 더이상 하실 얘기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땐 몰랐다. 그 이야기를 왜 결혼 전날 '특강'으로 하셨는지를...... .



흔히들 여자들이 결혼과 동시에 아줌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여자들은 다르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여자들은 아가씨 때와 별로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욱 아가씨처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더 화려해지고 더 예뻐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가씨가 아줌마로 둔갑하는 것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이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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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저녁 시간. 맛깔나게 무쳐놓은 시금치 나물과 오징어채, 얼큰하게 끓여 놓은 돼지고기 김치찌개, 몸에 좋은 샐러드와 땅콩, 호두가 듬뿍 들어간 콩자반, 없으면 허전한 계란 말이와 구운 김, 친정에서 공수해 온 갖가지 김치들을 잔뜩 차려 놓고 냠냠 쩝쩝 행복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중반으로 치닫는 순간 나는 빠르게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에 남아 있는 밥의 양과 반찬의 양을 비교해 보았다. 이 정도라면 얼추 밥과 반찬의 비율이 비슷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며 안심했는데 아뿔싸 식사 종료. 반찬들이 또다시 애매한 숫자로 남아서 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금치 나물과 오징어채는 반줌씩, 샐러드와 콩자반은 한 숟가락 정도, 계란 말이 세 개과 김 몇 장, 김치 몇 조각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민망한 양 만큼 남아 있었다. 럴수럴수 이럴수! 남편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밥도 두 숟갈 정도를 남겼다. 나 또한 이미 배불리 식사를 마친 상황이었기에 정말 기가 막히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모두 식탁을 떠난 순간 나는 '2차'로 남은 반찬 싹쓸이에 들어갔다. 모든 접시들이 비워지는 것은 한 순간이요, 내 뱃살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은 숙명이다.

어쩔 수 없는 아줌마 본능으로 밥상을 싹쓸이 하고 나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 왔다. 정말 내가 아줌마가 됐구나 싶었다. 물론 밥상 싹쓸이는 이미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이런 감정의 쓰나미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늘어진 티셔츠도 입게 됐냐고? 임신 이후 더이상 맞는 옷이 없어질 무렵부터 나는 은근 슬쩍 남편의 오래된 티셔츠를 탐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다솔이가 토하고 침흘려 얼룩덜룩 해 진 남편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 변명을 좀 하자면 소중한 내 옷에 다솔이가 토하는 것은 싫으니까? 아, 귓가에 설경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쯧쯧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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