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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에서부터 이어진 계단의 맨 아래 칸에 서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지 십여 분 남짓, 기다리는 사람도 특별한 까닭도 없으면서 나는 장승처럼 그 곳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그렇게 해가 쨍쨍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비가 올 것을 알아 차렸을까?

빗방울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방 속에 다소곳이 보관해 두었던 우산을 하나씩 꺼내 들고 무심히 나를 스쳐 목적지를 향해 갔고, 정확히 2분 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나를 지나쳤지만 나는 그곳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보다 빗방울은 더욱 거세져 이제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처럼 우산이 없어서 발이 묶였던 사람들 중에 더러는 오히려 젖는 것을 즐기는 듯 신나게 비를 향해 몸을 던졌고 더러는 포기한 듯 가방이며 신문을 머리에 쓰고 뛰기 시작했다.

슬슬 한기가 돌아서 나도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내리는 모양새를 보니 지나가는 비는 아니니 쉽게 그칠 리도 없었다. 이럴 땐 늘 첫 걸음이 어려운 것이다. 막상 빗 속으로 들어가 보면 예상외로 시원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비를 맞으려는데 어디선가 우산 하나가 쓱 올라왔다. 우산 위로 파란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펼쳐진 우산 위에 하늘 그림이 그려져 있는 1단짜리 긴 우산이었다. 누굴까, 내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은...... . 사거리 약국까지 씌워 드릴게요. 고개를 돌려 보니 앳된 여대생이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푹 놓이며 고마움이 마구 샘솟았다. 정말 고마워요.

When it rains...
When it rains... by EJP Photo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5년도 넘은 어느 날의 일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세차게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특히 여학생이나 아주머니를 보면 꼭 그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간다. 방향이 달라 얼마 못 가서 헤어진 경우도 있고 우리집 근처까지 행선지가 같아서 꽤 오래 같이 걸은 적도 있다.

동성이긴 하지만 낯선 사람과 한 우산을 쓰고 가는 것이 어색한게 당연하니까 어떨 땐 너무 서먹해서 괜히 잰걸음으로 걷기도하고, 우산이 작아서 어깨가 젖기도 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뜨뜻하고 흐뭇한 그 무언가가 있어서 나는 5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산 나눠쓰기를 하고 있다.

물론 내가 우산을 얻어 쓴 적도 참 많다.

동성에게서 받은 호의이기에 그 속에 혹 '흑심'이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지 않아도 되니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서도 쉽게 친절한 마음을 베풀 수도, 기꺼이 받을 수도 있는 것 같다. 내일도 비가 내린다던데 깜박하고 우산을 잊고 나온 사람이 눈에 띈다면, 함께 우산을 쓰고 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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